성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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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내가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은 몸으로 심사(心事)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옷은 포의(布衣)로 하고 염(斂)은 지금(紙衾 종이 이불)으로 할 것이며, 띠풀을 엮어 관(棺)을 덮고 소가 끄는 수레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충분하다.}}
 
{{인용문2|내가 덕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나를 참소하는 것이요, 임금에게 불충하고 사회에 덕을 닦지 못했다. 내가 죽은 후 장사를 박하게 하여 생전에 펴보지 못한 뜻을 세상에 알게 하라.}}
그리고 장례는 간소하게 할 것과 성현의 말씀대로 행할 것을 주문한다. 또한 어가를 보고도 묵살했다는 주장은 참소임을 호소하였다. 그해 [[6월]] [[경기도]] 파주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당시 그의 향년 63세였다. 죽은 후, 반대파들에 의해 관작을 빼앗겼다. 저서로는 《우계집》, 《주문지결 (朱門旨訣)》, 《위학지방 (爲學之方)》 등이 있다.
 
그리고 장례는 간소하게 할 것과 성현의 말씀대로 행할 것을 주문한다. 또한 어가를 보고도 묵살했다는 주장은 참소임을 호소하였다. 그해 [[6월]] [[경기도]] 파주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당시 그의 향년 63세였다. 죽은 후, 반대파들에 의해 관작을 빼앗겼다. 저서로는 《우계집》, 《주문지결 (朱門旨訣)》, 《위학지방 (爲學之方)》 등이 있다. 당시 그의 향년 63세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