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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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장공파(左營公派) 파시조 12세조 지일삼
* [[충주 어씨]]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충주 지씨 6세라고 한다.
 
== 인물 ==
충주 지씨는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16세까지 모두 11대 36명의 평장사를 배출하였다. 그 중 충의군파(忠義君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며, 충의군파(忠義君派)가 전체 충주지씨 인구의 80%를 차지한다. 고려에 36명이 정2품인 평장사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고려말 지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지용기]], [[지용수]], [[지용도]] 등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의 과정에서 숙청되면서 가문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근대 인물로는 [[조선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종두법을 도입한 [[지석영]],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등이 있다.
 
* [[지자심]](池資深, 1149년 ~ ?) : 고려 명종 때 낭장(郎將)을 지내고, 신종 때 경상도 안찰사, 호부시랑, 평장사를 지냈다.<ref>[http://db.history.go.kr/id/kj_014r_0010_0060_0090_0030 《고려사절요》 권14 신종(神宗) 5년 12월]</ref> 외손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채송년]](蔡松年).
 
* [[지윤보]](池允輔, ? ~ 1295년) : [[권문세가]]인 [[경원 이씨]] 이덕손(李德孫)과 사돈을 맺었다. 1282년 대장군으로서 2등공신이 되어 전민(田民)을 하사받고,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에 이르렀다.<ref>[http://db.history.go.kr/id/kr_031r_0020_0030_0010 《고려사》 세가 권제31 충렬왕 21년 3월]</ref>
 
* [[지윤]](池奫, ? ∼ 1377년) : 15세손. 공민왕 때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되었으며, 서북면원수·경상도상원수 등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우왕 때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재상에 올랐으며, 이인임·최영 등과 국정을 논하였다. 아들 지익겸은 대장군이고 큰 딸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진안대군]]과 결혼하였다. 둘째와 셋째 딸은 조선 제2대왕 정종과 혼인한 [[성빈 지씨]]와 [[숙의 지씨]]이다.
 
* [[지용수]](池龍壽, 1313년 ~ ?) : 16세손. 시중 평장사(侍中平章事) 지환(池桓)의 아들. 고려 충목왕 때 현릉직(顯陵直)으로 보임되었고, 공민왕 때 홍건적이 침입하자 경성(京城) 수복에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었다.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가 되었다가 전공판서(典工判書)로 옮겼으며, 규의선력공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전공판서로서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어 덕흥군(德興君)의 군대를 격퇴한 공으로 추성규의선력공신(推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더하여 하사받았으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1365년 밀직사·지도첨의상원수(知都僉議上元帥)가 되고 이듬해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이어 서북면상원수 겸 평양윤이 되었다. 벼슬은 [[문하시중]] 찬성사(門下侍中贊成事) 겸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외손자는 조선 세종 때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이다.
 
* [[지용기]](池湧奇, 1330년 ~ 1392년) : 17세손. 공민왕 때 삼사우윤에 이르고, 우왕 때에 예의판서가 되었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해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8년(우왕 4) 전라도도순문사가 되어 장흥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1381년에 지밀직사사로서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가 되었고, 1382년 양광·전라도·경상도 조전원수(楊廣全羅慶尙道助戰元帥)로 기용되어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4년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전라도도원수가 되었고, 이어 전라도도순문사로 다시 왜를 쳤다. 1388년에는 요동(遼東)정벌에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했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편을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그 뒤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나 처의 재종 [[왕익부]](王益富)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 [[지유용]](池有容, 1363년 ~ 1437년) : 18세손. 지용기의 아들. 1426년(세종 8) 지영강현사(知永康縣事), 영강진첨절제사(永康鎭僉節制使)를 거쳐 1430년(세종 12)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로 임명되었고 1432년(세종 14) 판경성군사로 있을 때 경원을 군마로 부방(赴防)할 것과 공물의 감면을 상언하였다. 이어 종성도호부사(鍾城都護府使), 강계부사(江界府使), 판의주목사(判義州牧事) 등을 역임하였다.
 
* [[지호 (1396년)|지호]](池浩, 1396년 ~ 1447년) : 지유용의 차남. 한성 소윤, 원종공신.
 
* [[지정]](池淨, ? ~ 1453년) : [[우의정]] [[정분]](鄭苯)의 생질. 자는 희용(希容), 호는 우송당(友松堂). 1438년(세종 20년) 함길도 경력(經歷), 1440년 회령(會寧) 첨절제사(僉節制使) 겸 판관(判官)을 지내고, 1444년(세종 26) 삼군진무(三軍鎭撫)로서 경상도선위관에 차견(差遣)되어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된 민심을 무마시켰다. 1448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파견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 입조하여 특지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발탁되었으며, 1451년 첨지중추부사가 되면서 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를 겸직하였다. 1453년(단종 1)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계유정난]]이 일어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에 의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논죄되어 교살되었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 [[지계강]](池繼江, 1422년 ~ 1460년) : 첨지중추원사, 상호군, 곽산군수, 증 병조참의
 
* [[지준]](池浚, 1442년 ~ 1489년) : 덕산현감(德山縣監). 영의정 [[윤필상]]의 사위.
 
* [[지달하]](池達河) : 지용기의 6대손. 진사로서 1465년(세조 11)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고, 1481년(성종 12)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489년(성종 20) 한어(漢語)에 능하고, 중국과의 외교문서와 관청의 공문서에 사용된 이문(吏文)에 능하며, 또한 심행(心行)이 독실(篤實)해 타의 모범이 된다 하여 승문원관에 제수되었다. 이후 한어와 이문의 교육에 전념하였고, 정3품 판교(判校)에 이르렀다.
 
* [[지성해]](池成海, 1565년 ~ 1635년) : 자는 중심(仲深). 아버지는 내금장(內禁將) 지이정(以貞). 임진왜란 당시 이인서(李麟瑞)와 더불어 의병을 모아 활동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었으며 1617년 생원의 대표로 진사 김이일(金以一) 등과 함께 인목대비 폐비 문제를 공론에 따라 처리하여 대의를 밝히라는 상소를 올렸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여 강령현감을 지냈다. 사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증직되었다.<ref>[http://chungju.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ungju&dataType=01&contents_id=GC01901066 지성해 - 충주향토문화대백과]</ref>
 
* [[지덕해]](池德海 , 1583년 ∼ 1641년) : 자는 수오(受吾), 호는 뇌봉(雷峯). 고조모는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장령(掌令),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하고,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추증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좌도 소모관(忠淸左道召募官)으로서 군량(軍糧)을 모집하였으며, 이듬해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에 항쟁하고자 했으나 화의가 성립되어 낙향하여 북벌론을 선창하며 제자를 양성하였다. 저서로 《뇌봉집(雷峯集)》이 있다. 그의 맑고 깨끗한 절개를 기리고자 [[송시열]]이 묘비를 찬(撰)하고 [[송준길]]이 서(書)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7467 《국조인물고》 권28 명류(名流)]</ref>
 
* [[지여해]](池汝海, 1591년 ∼ 1636년) : 충의군(忠義君) 지용기(湧奇)의 8대손. 고조모는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영변통판으로 300여 군사를 이끌고 운산의 적을 기습, 패주시켰다. 병자호란 때 철산부사(鐵山府使)로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순절하여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7468 《국조인물고》 권63]</ref>
 
* [[지계최]](池繼崔, ? ∼ 1636년) : 1623년(인조 1) 서로소모별장(西路召募別將)을 지내고,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631년 희천군수(熙川郡守)를 지낸 뒤 서흥부사(瑞興府使)로 나가 선정을 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전사하여 충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표곡실기(豹谷實紀)》가 있다.
 
* [[지천석]](池天錫, 1620년 ~ ?) : 자는 대수(大受), 호는 호산(壺山), 시호는 장헌(章憲). 1648년(인조 2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숙종 12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禮曹正郞)과 승지(承旨)를 역임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 [[지광한]](池光翰, 1659년 ∼ 1756년) : 호조좌랑(戶曹佐郞) 지석구(池錫龜)의 손자. 자는 휘보(輝甫), 호는 설악(雪嶽)‧대충와(大蟲窩). 저서로 《홍사(鴻史)》, 《기전첩록(紀傳捷錄)》, 《경제팔책(經濟八策)》, 《[[설악유고]](雪嶽遺稿)》 등이 있다.
 
* [[지석영]](池錫永, 1855년 ~ 1935년) :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1879년 처음 종두를 실시하여 천연두를 퇴치하였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위생국에서 두묘의 제조법과 독우(犢牛)의 채장법(採漿法) 등을 배우고 귀국한 뒤 우두국(牛痘局)을 설치하여 종두를 실시하고 그 방법을 가르쳤다. 1883년(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동래부사를 지내고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99년 경성의학교를 설립하여 10년간 교장으로 있었다. 1905년에는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왕에게 상소하여 공포케 하고 학부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케 하였다. 1909년 옥편의 효시인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였다.
 
* [[지청천]](池靑天, 1888년 ~ 1957년) : 고종의 주선으로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일본을 탈출하여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敎成隊長)을 지내며 독립투사를 양성하였다.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군대를 이끌고 대한독립군단에 편입하여 여단장이 되었다.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40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1947년 귀국하여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 과거 급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