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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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김복진 자작상 1923.jpg
| 설명 = 1923년에 만든 자작 상
| 출생일 = [[1901년]]{{출생일|1901|11|3}}
| 출생지 = {{국기|대한제국}}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청주시)|남이면]] 팔봉리<br />(現 {{국기|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청주시)|남이면]] 팔봉리)
| 사망일 = [[1940년]]{{사망일과 [[8월 18일]] (40세)나이|1940|8|18|1901|11|3}}
| 사망지 = {{국기|일제 강점기}} [[경성부]]<br />(現 {{국기|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국기|대한제국}} <br/> {{국기|일제 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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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
}}
'''김복진'''(金復鎭, [[1901년]] ~[[11월 3일]] - [[1940년]] [[8월 18일]])은 [[일제 강점기]]의 조각가이며, [[사회주의]] 계파의 진보 성향 문예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호는 정관(井觀), 본관은 [[신 안동 김씨|안동]](安東)이다.
 
== 생애 ==
[[충청북도1901년]] [[청원군충북]](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청주]]) 출신이다.출신이고,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
 
1924년 데이코쿠미전(帝國美展)에 작품 〈나상(裸像)〉을 출품, 입선하였다. 동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모교인 배재중학 교원이 되었다. 한편 ‘토월미술연구회(土月美術硏究會)’, 청년학관(靑年學館, Y.M.C.A.) 미술과, 경성(京城)여자상업학교의 미술강사 등으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鮮展)에 작품 〈3년 전〉을 출품, 3등상을 수상한 것을 필두로 제5회 및 제16회 선전에서는 특선, 제15회 선전에 입선되었다. 1930년 [[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지내는 한편 ‘조선미술원(朝鮮美術院)’을 창립했고 1936년 [[법주사]] 대불(大佛)을 착공하여 미완성인 채 [[서울]]에서 사망했다.<ref name="글로벌_1">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근대미술/한국 근대조각/김복진,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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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 아내: '''[[허하백]]'''(許河伯, [[1909년]] ~- ?, [[교육|교육자]], [[정치가]]. 前 [[전국부녀총동맹]] 제2부총재.)
* 동생: '''[[김기진|김팔봉]]'''(金八峰, [[1903년]] [[6월8월 29일21일]] ~- [[1985년]] [[5월 8일]], 본명 '''[[김기진]]'''(金基鎭). [[시인]], [[소설|소설가]], [[문학]][[평론가]].)
* 조카딸: '''[[김복희 (1928년)|김복희]]'''(金福姬, [[1928년]] [[3월 31일]] ~- , [[소프라노]] [[성악가]]. [[개신교]] 신자. 前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김기진|김팔봉]]'''의 딸.)
 
== 학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