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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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해군이라는 표현은 어디에서도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제국해군이 오히려 맞는 표현이겠죠.
링크를 너무 과다하게 추가하신 것 같아 전부 되돌립니다. 더군다나 링크가 문맥과 맞지 않는 것도 많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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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ospital ward.jpg|섬네일|왼쪽|서부전선의 영국군 야전병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군([[독일군의 군사 서열 (1914년)|제7 야전군]]의 서부군)은 개정된 [[슐리펜 계획]]에계획에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 독일군은 중립국인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 국경으로 진군, 독일 국경에서 프랑스군을 둘러싸 남쪽으로 포위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계획은 [[제2차 세계 대전|2차세계대전]]에서도 쓰였다.<ref name=AJPT2/> 프랑스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독일은 한 전선에서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동시에 다른 전선에서는 러시아를 공격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충족시키기 위해, 슐리펜 계획은 1870~1871년의 [[보불전쟁]]과 같이 최대한 빨리 프랑스로부터의 항복을 얻어내기 위한 계획으로 짜여졌다. 또한, 프랑스에서 빠른 승리를 위해 라인 강의 서부가 국경과 맞닿아 있는 알자스로렌의 험한 지형을 통해 공격하는 대신 영국 해협으로 진군하여 영국의 지원을 저지한 이후 파리를 공격한다는 작전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대부분의 군대를 러시아로 보냈다. 러시아는 동맹국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동원령]]을 완료하는데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일:German soldiers in a railroad car on the way to the front during early World War I, taken in 1914. Taken from greatwar.nl site.jpg|섬네일|오른쪽|1914년, 전선으로 가는 길에 있는 [[화차 (철도)|화차]]에 있는 독일 군인. 전쟁 초기에는 양 측이 매우 짧은 전쟁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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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일어난 [[1차 마른 전투]] 이후 [[삼국 협상|협상국]] 및 독일군은 서로 측면을 포위하기 위해 북부에서 기동전을 시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기동전을 [[바다로의 경주]]라고 부른다. 이러한 측면 포위 시도가 모두 실패하면서, 영국 및 프랑스는 곧 독일 제국이 벨기에 해안부터 [[로렌]] 지역까지 단단하게 구축한 방어선을 이룬 것을 보게 되었다.<ref name=AJPT2/> 독일은 점령 지역을 방어하면서 영국 및 프랑스군에 대한 공격을 모색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군의 참호는 프랑스 및 영국군의 참호보다 더욱 많이 건설되었다. 영국-프랑스군의 참호는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전까지 머무르는 "임시적인" 방어선에만 끝나 있었다.<ref>{{harvnb|Goodspeed|1985|p=199 (footnote)}}</ref>
 
양측은 과학 기술의 진보를 이용하여 교착 상태를 깨려 시도했다. 1915년 4월 22일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처음으로 ([[만국 평화 회의]]의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는) [[염소 (원소)|염소]] 가스를 이용했다. 곧 양측에서 여러 종류의 가스 사용이 일반화되었고, 결정적으로 증명되진 않았지만 전투를 겪은 군인들은 [[독가스|독가스 전쟁]]이전쟁이 가장 두렵고 기억에 남는 공포가 되었다.<ref>{{웹 인용 |author=Michael Duffy |url=http://www.firstworldwar.com/weaponry/gas.htm |title=Weapons of War: Poison Gas |publisher=Firstworldwar.com |date=22 August 2009 |accessdate=5 July 2012}}</ref><ref>{{harvnb|Love|1996}}</ref> 1916년 9월 15일에는 전체적으로는 [[솜 전투]]의 일부인 [[플레르-쿠르슬레 전투]]에서 영국군이 처음으로 전차를 이용했고,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차의 효과는 커졌다. 독일군은 자신들이 디자인한 전차는 매우 적은 수를 사용했으며, 대부분은 연합국에게 노획한 전차를 이용했다.
 
[[파일:French 87th Regiment Cote 34 Verdun 1916.jpg|섬네일|오른쪽|1916년, 베르됭의 프랑스 87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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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7월부터 11월까지 이루어진 [[파스샹달 전투]]는 이 기간 벌어진 영국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프랑스의 지원)가 되었다. 이 공세는 10월 전장이 진흙탕으로 되기 전까지 연합국 사이의 약속으로 진행되었다. 사상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존재하지만 거의 20만명에서 40만명 사이로 추측한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은참호전은 몇 년 동안 많은 지역의 점령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전선은 종종 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은 [[1917년 서부 전선의 전술 개발|끊임없는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전장으로 나타났다.
 
=== 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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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ustrians executing Serbs 1917.JPG|섬네일|왼쪽|1917년, 포로로 잡은 세르비아 군인을 처형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인. 전쟁 기간 동안 [[세르비아 왕국]]은 85만명이 사망하면서 전쟁 전에 비해 4분의 1의 인구가 감소했다.<ref>"[http://international.loc.gov/cgi-bin/query/r?frd/cstdy:@field(DOCID+yu0021) The Balkan Wars and World War I]". ''[[Library of Congress Country Studies]]''.</ref>]]
 
러시아와 직면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는헝가리는 세르비아를 공격한 군대의 3분의 1만 러시아 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다. 큰 손실을 입은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그러나, [[콜루바라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말까지 원래 전선으로 후퇴해야 했다. 1915년의 첫 10개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대부분의 군사를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외교관은 불가리아를 설득하여 세르비아를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지방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사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러시아 전선 등지로도 향해졌다.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었다.<ref>{{harvnb|Neiberg|2005|pp=54–55}}</ref>
 
[[파일:Flüchtlingstransport Leibnitz - k.k. Innenministerium - 1914.jpg|섬네일|오른쪽|1914년, [[슈타이어마르크주]] [[라이프니츠 (오스트리아)|라이프니츠]]에서 세르비아 난민을 운송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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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rshal Joffre inspecting Romanian troops during WWI.jpg|섬네일|왼쪽|1916년 루마니아군을 사열하는 [[조제프 조프르]]]]
 
루마니아는 1882년부터 동맹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루마니아가 참전할 의무가 없다고 말하면서 [[중립|중립국]]을중립국을 선언했다. 협상국이 루마니아가 동맹국에게 선전포고하는 대가로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와 같이 루마니아인이 많이 사는 큰 영토를 보장해주자, 1916년 8월 27일 [[루마니아]] 정부는 협상국에 가입하여 [[트란실바니아 전투|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하여 러시아의 제한된 지원을 받고 참전했다. 루마니아의 공세는 초기에는 성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밀어냈지만 이후 동맹국의 반격으로 인해 다시 루마니아-러시아 국경으로 후퇴해야 했다.<ref>Michael B. Barrett, ''Prelude to Blitzkrieg: The 1916 Austro-German Campaign in Romania'' (2013)</ref> 동맹국이 [[부쿠레슈티 전투]]에 승리하면서 1916년 12월 6일에 루마니아의 수도가 함락되었다. 1917년에는 [[몰도바]] 지역에서 전투가 계속되면서 동맹국은 지루한 교착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www.worldwar2.ro/primulrazboi/?language=en&article=116 |title=The Battle of Marasti (July 1917) |publisher=WorldWar2.ro |date=22 July 1917 |accessdate=8 May 2011}}</ref><ref>Cyril Falls, ''The Great War'', p. 285</ref> 1917년 말 [[10월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가 항복하자, 루마니아는 1917년 12월 9일 동맹국과 휴전해야 했다.
 
[[파일:Romanian troops at Marasesti in 1917.jpg|섬네일|1917년 [[마라세스티 전투]]에서의 루마니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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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전 ===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이래, [[연합국]]은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동맹국 (제1차 세계 대전)|동맹국]]의동맹국의 군대가 차례대로 투항했다.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가, 그 다음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순으로 항복했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같은 날, 독일의 [[킬]](Kiel) 군항에서는 해군 수병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다. 파급 효과는 엄청났는데, 곧바로 독일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여 군경과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제위를 포기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은 군주제를 포기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하였으며,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휴전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약 9백만이 전사한 이 전쟁은 끝이 났다.
 
==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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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제국 ====
[[바이마르 공화국|바이마르]] 공화국 탄생
* 막대한 배상금 지불
* 독일의 일부 영토였던 폴란드 땅이 독립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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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만 제국 ====
* [[터키 공화국]] 탄생
*[[그리스]]에 그리스에 [[이즈미르]] 할양
* 영국 위임 통치령: 트란스요르단, 키프로스, 이라크
*[[ 프랑스]] 위임 통치령: 시리아, 레바논, 아르메니아
* [[네지드 술탄국]]과 [[헤자즈 왕국]]에 [[메카]], [[메디나]] 등을 할양
*[[연합국]]과 연합국과 [[세브르 조약]] 체결
 
== 사상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