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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호선진(胡仙眞)으로 알려져 있다. 관료 가문 출신의 그녀는 북위의 황실에 드나들던 여승의 조카로, 고모의 추천으로 세부(世婦)가 되어 입궁했다. 당시 북위에선 외척의 세력 발호를 막기 위해 태자를 책봉하고 나면 그 생모로 하여금 자결하게 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궁 안의 비빈들이 태자가 될 아들 낳기를 두려워했지만 호씨는 조금도 겁내지 않았고 [[510년]] 훗날의 효명제가 되는 원후를 낳았다.
 
원후가 태자로 책봉될 무렵 중급사 유등과 지중령군 우충 등의 간언으로 생모를 자결하게 하는 악습도 폐지되어 호씨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515년]] 선무제의 죽음으로 원후가 효명제로 즉위했고 호씨는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하게 되었다. 호태후는 권력을 믿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시동생인 문헌왕(文獻王) 원역(元譯)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호태후의 매부였던 원차는 이를 알고 원역을 죽이고 호태후를 북궁 선광전에 감금시켰지만 호태후는 아들을 회유해 원차를 축출하고 조정에 복귀했다. 효명제가 후계자 없이 죽자 그의 딸 [[북위 효명제의 딸|원씨]]를 아들이라고 속여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다음날에 자신의 손녀가 여자라는 사실이 탄로날까봐 두려워 즉위한지 하루만에 폐위하고 세 살에 불과한 [[효문제]]의 증손자 [[원쇠원조]](元釗)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호태후와 원쇠는원조는 대도독 [[이주영 (북위)|이주영]]에게 잡혀 황하에 던져져 죽었다.
 
==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