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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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운동은 '중체서용'이 의미하듯 서양의 과학기술, 특히 군수시설을 받아들여 중국의 '자강'을 꾀하려는 부국강병 운동으로 그 내용은 무기와 장비,군사시설에 집중되어 있다.
[[이홍장]]은 [[1863년]] [[상하이]]에 '강남제조총국'을 세워 총포, 탄약, 기선 등을 만들고, [[난징]]에는 '금릉기기국'을 세워 대포, 화약을 생산하였다. [[좌종당]]은 [[푸저우]](복주)에 [[1866년]] '선정국'(船政局)을 세워 윤선(輪船)을
한편, 공장이 필요로 하는 [[석탄]]과 철 등을 공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광산이 개발되어 근대적 채광 시설을 갖춘 광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또 공장의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번역관과 교육 기관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이 번역 보급되면서, 기술 인력이 양성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1874년]] 일본의 [[모란사 사건]]을 계기로 양강총독 겸 남양대신 [[심보정]]은 남양 해군을 창설하여 근대적 해군을 육성했으며, [[이홍장]] 등은 해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1884년]] [[북양 함대]], [[남양 함대]], [[복건 함대]]의 3대 함대를 창설했다. 함대는 중국에서 건조한 배도 있었으나 주력함은 주로 [[영국]], 독일에서 구입하였다. 이들 해군은 회군파와 상군파로 나뉘어 통일적인 지휘계통이 이루어 지지 못했으므로 [[1884년]]에 터진 [[청불전쟁]]에서 복건함대가 궤멸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 밖에 유능한 지휘관 양성을 위해 [[톈진]]에 '수사학당'(水師學堂)(1880년)과 무비학당(武備學堂)(1885년)을 세우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군사고문을 초빙하여 서양식 군사학을 교육하였다.
또 외교관 양성을 위해 [[장지동]]은 [[총리아문]]에 동문관(同文館)을 [[1867년]] 설치하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의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증국번]]은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미국]]으로 유학시켰고, [[이홍장]]은 독일, [[영국]], [[미국]] 등지로 유학생을 보내어 군사와 무기에 관하여 연구하도록 하였으며, [[동문관]]에서도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개혁활동은 [[마건충]]을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 활동했던 인재들이 이를 통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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