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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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에 [[후에]]의 [[응우옌 왕조]]의 통치자들은 베트남 관리 [[응우옌 후 껀]]을 보내어 이 지역에 베트남 행정 조직을 설립케 하고 이에 간섭할 만큼의 힘도 없던 [[캄보디아]]를 이 지역에서 축출하였다. 그는 사이공의 확장에 기여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1790년]] 프랑스인 건축가 [[보방]]이 "[[쟈딘성]]"이라는 거대한 성을 지었는데 이는 약 70년 후 [[1859년]] [[끼호아 전투]] 중에 프랑스군이 파괴하였다.
 
[[1858년]]부터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1859년]] [[2월 17일]], [[프랑스 해군]]은 [[리고 드 주누이]] 제독 지휘 하에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1859년]]에 [[프랑스]]에 정복당한 이후 이 도시는 식민지 기간 동안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도 수많은 전통 서양식 건축 양식을 반영한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는 사이공이 "동아시아의 진주"({{llang|vi|Hòn ngọc Viễn Đông}}) 또는 "동양의 파리"({{llang|vi|Paris Phương Đông}})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1954년]]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비엣민]]에게 져서 베트남으로부터 축출당하였다. 그러나 [[비엣민]]은 새로운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바오 다이]] 황제가 추대되었다([[베트남 제국]]). [[1950년]]에 바오 다이 황제는 사이공을 수도로 삼았었다. 그때 사이공과 베트남 화교들이 주로 거주하던 [[촐롱]]시가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되었고 수도‘수도 사이공({{vie|v=Đô Thành Sài Gòn|hn=都城柴棍}})이라사이공’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트남이 [[북베트남]](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으로 나뉘게 되었을 때, 사이공은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이끌던 남베트남의 수도였다.
 
교외의 [[껀저]]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베트남 전쟁]]의 결과, [[1975년]] [[4월 30일]] 이 도시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를 [[미국]]에서는 사이공 '''함락'''이라고 부르나, 베트남에서는 사이공 '''해방'''이라 부른다.
 
이후 호찌민시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으나 베트남 현지에서는 여전히 사이공이라는 명칭이 많이 쓰이며 이곳의 항구 이름도 그대로 [[사이공 항]]으로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