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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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시는 "프레이 노코르"라는 작은 어촌 마을로 시작하였다. 현재 호찌민시 지역은 원래 습지대였고 베트남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몇 세기 동안 크메르인들이 살아 왔다. [[1623년]] [[캄보디아]]의 체타2세 국왕(재위: [[1618년]]-[[1628년]])은 [[베트남]]의 [[찐응우옌 전쟁]]을 피해서 온 베트남 난민들이 "프레이 노코르" 지역에 정착하도록 허용하였고, 프레이 노코르에 세관을 짓도록 하였다. 베트남에서 온 이주민의 수는 증가하였고, 캄보디아 왕국은 [[태국]]과의 전쟁으로 약해져서 이 지역에 대한 통치력이 약해졌으며 따라서 이 지역은 서서히 베트남화되어갔다. 그때 프레이 노코르가 "사이공"이 되었다.
 
[[1698년]]에 [[후에]]의 [[응우옌 왕조]]의 통치자들은 베트남 관리 [[응우옌 후 껀]]을 보내어 이 지역에 베트남 행정 조직을 설립케 하고 이에 간섭할 만큼의 힘도 없던 [[캄보디아]]를 이 지역에서 축출하였다. 그는 사이공의 확장에 기여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베트남인들은 이 곳을 '''[[쟈딘성|자딘]]'''이라고 불렀다. [[1790년]] 프랑스인 건축가 [[보방]]이 "[[자딘성 (건축물)|자딘성]]"이라는 거대한 성을 지었는데 이는 약 70년 후 [[1859년]] [[끼호아 전투]] 중에 프랑스군이 파괴하였다.
 
[[1858년]]부터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1859년]] [[2월 17일]], [[프랑스 해군]]은 [[리고 드 주누이]] 제독 지휘 하에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1859년]]에 [[프랑스]]에 정복당한 이후 이 도시는 식민지 기간 동안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도 수많은 전통 서양식 건축 양식을 반영한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는 사이공이 "동아시아의 진주" 또는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