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7번째 줄:
* [[연산군]] 때에 문묘의 신판(神版)을 태평관으로 옮긴 뒤 그 안에 짐승을 기르는 등 한 동안 문묘 기능을 상실했다가 [[중종반정]] 후 복구되었다.
* [[고려]]조 [[정몽주]] 이하 15현의 문묘 종사는 [[조선 중종]] 때부터 [[조선 고종|고종]] 사이에 이루어 졌다.
* [[중종반정]]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 세력들은 [[조선 세조|세조]]와 [[연산군]] 시대를 거치면서 자의적으로 행사된 왕권을 견제하고 막을 수 있는 이상적인 이념을 문묘 종사라 생각하고 4현(四賢)<ref>정몽주,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ref>의 문묘 종사를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이후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포함한 '5현(五賢)'<ref>[[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ref>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 [[1517년]](중종 12) [[정몽주]]의 문묘 종사가 이루어 졌다.
*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문묘를 [[1604년]](선조 37) 중건을 계기로 '5현(五賢)'의 문묘 종사가 다시 논의되었으나, [[조선 선조|선조]]는 [[이언적]]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등의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 [[광해군]]이 즉위하자 [[성균관]]의 유생 및 지방의 유생들도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예조, 대간, 대신들도 그 의견에 동조하여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이른바 '5현(五賢)'의 문묘 종사가 [[1610년]](광해군 2) 이루어졌다.
* [[이이]]·[[성혼]] 등의 종사 때에는 서인·남인간의 학맥과 현실 정치가 연결되어 [[1681년]](숙종 7) 문묘 종사되었으나, [[1689년]](숙종 15) 출향되고,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때 다시 복향(復享) 되었다. [[김장생]]도 [[1688년]](숙종 14)에 종사되었으나, 출향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다시 복향(復享) 되었다.
* [[송시열]]·[[박세채]]등의 종사 때에도 [[노론]]과 [[소론]]·[[남인]]의 대립으로 강력한 반발이 있었으며, [[송시열]]·[[송준길]]은 [[1756년]](영조 32)에, [[박세채]]는 [[1764년]](영조 40년)에 문묘 종사가 이루어 졌다.
* [[김인후]]의 문묘 종사는 [[1796년]](정조 20)에 이루어 지는데, [[조헌]]·[[김집]]의그의 문묘당색은 종사은따질 수 없으며 [[1883년호남]](고종 20)에제일의 이루어유현으로 졌다그동안 정치적 소외 되었던 호남 학파를 끌어 안는 효과를 가져왔다.
* [[조헌]]·[[김집]]의 문묘 종사는 [[조선 영조|영조]] 때부터 [[노론]]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대두되었으나, [[1883년]](고종 20) 이루어 졌다.
* 조선 후기에 최종적으로 [[공자]]를 정위에 두고, 좌우에 4성·[[공문십철|10철]] 및 중국 송조 6현<ref>송나라 6현 :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를 말한다.</ref>을 배향하고, 동무와 서무에 중국의 명현 94위와 우리나라 [[동방 18현|18현]]의 신위를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