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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1일]]에 담양을 출발하여 북상을 시작, [[6월 13일]] 전주로 가서 아들 [[고종후]](高從厚)에게 영남에서 올라오는 왜군을 막게 하였다. 22일 충청도 여산(礪山)을 거쳐 27일 은진(恩津)으로 이동했다.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점차 호남에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연산(連山)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전라도 [[광주광역시|광주]]와 [[장흥]] 등에서 모집한 6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임금을 지키러 의주로 가던 중 전주에서 군사를 정돈하여 말머리를 돌려 금산으로 갔다. 일본군이 금산에서 금산 관군과 의병을 전멸시키고 군수도 전사한 상태였다. 그는 금산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병력을 재정비하고, [[금산군|금산]]에 집결하고 있던 왜군과 싸우다가 아들 권지성균관학유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금산의 성곽이 튼튼해서 함락이 어렵자 그는 방어사와 함께 군사를 움직여 8백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공격했다. 그러나 중간에 곽영의 부하장수 김성헌 등이 도망갔다. 금산의 일본군은 광주, 흥덕에서 추가로 올라온 일본군과 합세하였다. 그해 [[7월 10일]] 그는 와은평(臥隱坪) 일대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던 중 고경명은 [[말]]에서 낙마, 떨어졌다. 바로 안영과 유팽로가 말에서 내려와 그를 부축했지만 뒤쫓아온 일본군의 칼에 모두 베어 모두 죽었다. 성에 있던 아들 고인후 역시 의병들과 함께 전사한다. 그의 시신은 바로 수습되지 못하고, 죽은지 40여 일 만에 찾아냈는데, 여러번 여름비를 겪었으나 시신이 썩지 않고 살 색이 산사람 같아서 보는자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당시 향년 49세였다59세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