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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문묘 (베트남)||베트남의 공자묘}}
 
'''문묘'''(文廟)는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자로 [[공자]](孔子)의 신위를 받드는 묘우(廟宇)를 말한다.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묘(廟)는 무덤 묘(墓)가 아니라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祠堂)을 뜻하며, 동아시아 전반에 분포해 있다. 문묘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위시한 4성(四聖)을 배향하고, [[공문십철|공문 10철]](哲) 및 송조 6현(賢)과 우리나라의 [[신라]]·[[고려]]·[[조선]]조의 [[동방 18현]]을 종향(從享) 하였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중정일(中丁日)에 제례 의식인 [[석전대제|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하고 있다. 태학생(太學生)들의 사표로 삼았다.
 
==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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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
* [[1949년]] 전국 유림 대회를 개최하여 우리 문묘에 [[중국]]의 유학자들인 [[공문십철|공문 10철]]과 공자의 72제자 및 한⋅당⋅송⋅원대의 22현까지 봉안하는 것은 [[사대주의]]]의 표현이라 하여, [[공자]]를 위시한 4성(四聖)과 송조 2현 [[정호]]·[[주희]]를 제외한 나머지 중국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하고, 우리나라 [[동방 18현|18현]]을 [[대성전]]에 승봉키로 결의하였다. 또 전국의 [[향교]]에도 이와 같이 시행하도록 하였으나 이 개혁안에 대해 보수 유림들의 반발로 일제히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 [[1961년]] 2월 23일 전국 유림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매안한 [[공문십철|공문 10철]]과 송조 4현<ref>주돈이, 정이, 소옹, 장재</ref>을 복위키로 결의하였다. 이후 대부분의 전국 [[향교]]도 이를 따랐다.
 
== 배향 과정 ==
문묘 서차는 먼저 〈[[공자|대성지성 문선왕]]〉(大成至聖 文宣王) [[공자]]를 정위로 하여 남쪽을 바라보게 하고, 그 앞에 [[안자]]·[[증자 (사상가)|증자]]·[[자사]]·[[맹자]]의 4성을 동서로 나누어 배향하였다. [[공문십철|공문 10철]]<ref>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공문 10철에 덕행(德行)으로는 안회(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자로(子路),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가 있다.</ref>과 송조 6현 <ref>[[주돈이]]·[[정호]]·[[정이 (학자)|정이]]·[[소옹]]·[[장재]]·[[주희]])</ref> 및 우리나라 [[동방 18현]]을 종향 하였다.
 
문묘 종사 인물을 정하는 일은 학통·당파·정치 정세 등에 따라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점향(點享)되거나 복향(復享) 되기도 하였으며, 위차(位次)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반드시 [[중국]]의 예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정몽주]]는 [[고려 우왕|우왕]]과 [[고려 창왕|창왕]]이 신돈의 아들인 줄 알면서도 섬겼다는 이유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의심 받았고, [[광해군]]·[[조선 인조|인조]] 년간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5현의 종사시에 [[이언적]]은 [[을사사화]] 때 처신으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었으며, [[이황]]은 소년 시절 기생과 행적이 들춰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했다. [[조선 숙종|숙종]] 때 [[이이]]는 한때 불교에 몸담았던몸 담았던 전력 때문에 학문의 순정성을 의심받고, [[성혼]]은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때의 처신 때문에, [[김장생]]은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될 때 출향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다시 종향되었으며, [[영조]] 때의 [[송시열]]·[[박세채]] 등의 종사 때에도 논쟁이많은 분쟁을 있었다야기하였다.
 
또한 [[성리학]] 외에 [[노장 사상]]이나 [[양명학]] 등 이단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인물들은 철저히 배격됐다. [[서경덕]]이 그 대표적 예였다.<ref>[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260100021 '조선 유학에 오늘을 묻다; 담일청허(湛一淸虛)의 기(氣)로 조선에 학자가 있음을 알려라!'] 주간조선 2013년 6월 10일 백민정 성균관대 교수 칼럼 게재 중 -'광해군 6년(1614년) 문묘 종사(從祀) 논의에서도 [[이항복]]의 청원이 있었지만, 화담은 기수(氣數)에 치우쳐 이(理)를 몰랐다고 본 전대 사림의 부정적 평가로 인해 제대로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화담집'중 연보)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