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납치 암살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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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발단과 의문적 결말 ==
=== 김형욱의 월권 득세와 실각 ===
1961년 [[박정희]](朴正熙, 1917~1979)가 주도한 [[5·16 군사 정변]]에 [[박종규]](朴鐘圭, 1930~1985)· [[차지철]](車智澈, 1934~1979) 등과 함께 가담하여 그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고 1963년 7월, 제4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취임한 뒤
=== 곁가지 신세 전락한 김형욱의 국외 망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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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욱 암살 작전 ===
==== 김형욱 암살 기도 작전의 전모 ====
그 후 미국에 있던 김형욱은 1977년 당시 [[박동선 (1935년)|박동선]](朴東善, 1935~ )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두하여 박정희 정권의 비밀스런 사건들을 폭로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 멈추지 않은 채 [[김형욱]]은 곧이어 [[일본]]에서 회고록을 발표하자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당시 제8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 1926~1980)에게 [[김형욱]]을 없애라고 지시하였다.
==== 엇갈려버린 상반성 증언 ====
그러나 차라리 다른 의견을 여담에 포함하자면, 1979년 당시 육군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全斗煥, 1931~ , 훗날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당시 육군 소장이 1979년 10·26 사건 당시 김재규를 강도 높게 조사했지만 김형욱에 관한 말은 한마디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姜信玉, 1936~ , 훗날 [[민주자유당]] 국회의원) 등도 같은 증언이었는데 [[김경재 (1942년)|김경재]](金景梓, 1942~ , 훗날 [[평화민주당]] 국회의원)가 쓴 김형욱 회고록에 의하면 박정희가 내린 암살 관련 지시는 없었다고 한다.
==== 김재규와 이상열이 합동 작전 성공과 동시에 폭압 증발 처치한 김형욱 납치 암살 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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