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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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정변'''은 1961년 5월 15일 저녁부터 1961년 5월 18일 정오 무렵까지 서울, 부산, 대전, 광주, 김포, 부평, 수색, 포천 등에서 임시적 군정 실시를 목적으로 일어난 군사 반란을정변을 말한다. 주동자는 서울을 관할하는 제6 관구의 전 사령관이었던 [[박정희]]로 밝혀졌으며 십수명의 유능한 장성 및 수십명의 핵심 영관급 장교들과의 사전모의를 통하여 군정 수립 하고자 하였다. 사전에 참여 병력으로는 김포 공수단 1000여명, 해병 제1여단 1300여명, 6관구 사령부 소속 병력 1700여명,<REF>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 p.184 "혁명 장교들이 인솔하는 해병대 1300명, 공수단 1000여명 및 6관구 병력 등 도합 4000여명이었다."</REF>제6군단 포병단 5개대대 3000여명과 제5사단(사단장 채명신 준장이 이끌고 서울 진주), 제12사단(사단장 박춘신 준장과 부사단장 및 작전참모가 이끌고 춘천 진주), 제30사단(부사단장, 작전참모, 헌병부장이 사단 이끌고 서울 진주), 제33사단(작전참모, 연대장 등이 이끌고 서울 진주), 그리고 2군을 비롯한 지방에 있던 여러 장교들까지 수만명에 이르렀다.
 
<br />
 
== 반란의정변의 원인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09-10-11}}
[[파일:윤치영 1961.jpg|섬네일|왼쪽|140px|[[윤치영]],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장면]] 내각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파일:Chang Myon 194804'.png|섬네일|오른쪽|210px|[[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장면]]]]5.16의 발단은 정군 운동이었다. 이는 곧이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등 5.16 주체세력의 핵심 멤버 육사 8기생 9명이 분열된 상태로 무능한 국정운영을 펼치고 있는 민주당 세력을 제거해 군정을 수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725</ref> 이들은 그해 말에 이르면 박정희를 반란의정변의 지도자로 세우자는 데에 합의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7068&C_CC=AZ |제목=보관 된 사본 |확인날짜=2016년 10월 15일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61015044218/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7068&C_CC=AZ |보존날짜=2016년 10월 15일 |깨진링크=아니오 }}</ref> 박정희 소장은 만주군관학교 인맥, 군내 인맥 등을 이용해 장경순, 한웅진, 채명신, 이주일 등 자신과 알고지내던 육군장성과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 등을 거사에 끌어들였고 김형욱 등이 육본에서 동지들을 작전참모로 추천하면 부관감실에서 근무하던 오치성이 인사발령을 내는 방식과 포섭한 동지의 인맥을 이용해 2차·3차 포섭하는 방식으로 제30사단, 제33사단장, 문재준과 6군단 포병단, 공수전단 등을 포섭해 나갔다.<ref>혁명과 우상 1권 61~63쪽</ref>이 과정에서 제1201야전공병대 포섭은 실패해였다<ref>혁명과 우상 1권 63쪽</ref> 따라서 조직은 포섭될만한 이들을 중심으로 비밀스럽게 조직되었다. 그러는 동안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였던 [[장면]]은 이러한 정보를 조금씩 보고받거나 입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형욱 등은 전라도 국회의원들이 육군 장성들과 결합해 서울 인근 부대들을 포섭하려 한다는 소문, 족청계 장성들을 중심으로 일선 부대가 거사할 것이라는 소문 등 역정보를 3중, 4중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ref>혁명과 우상 1권 80~81쪽 & 망향 283쪽</ref> 심지어는 2군 부사령관 박정희와 육본과 후방 부대들을 동원해 거사하는데 육군참모총장이 그들과 결탁했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히 유포되어 장도영과 장면에게 각각 보고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5.16 반란세력은정변세력은 전화, 모임에서 사장, 전무, 공사장 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사업으로 위장함으로써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그 결과 막연한 반란설만으로정변설만으로 장성들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ref>1961년 4월24일 미 CIA 극동과가 서울 지부로부터 받은 정보 보고,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18893, 4월24일: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의 쿠데타 모의에 대한 견해. 장 장군은 박정희를 체포하고 싶어도 증거가 없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의 체포는 쿠데타를 촉발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또 이범석과 족청계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4월26일: 장면 총리는 불만을 품은 군부 내의 한 집단이 어떤 종류의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요지의 소문들을 알고 있다. 그는 이런 說(설)들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며 상황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장면은 참모총장의 업무 자세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다. 그는 장도영이 박력 있고 유능하며 미군 측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장 장군을 2년간 데리고 있을 계획이다></ref> 오히려 그러려면 장도영이 장도영 스스로를 체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장면과 장도영은 각각 검찰과 군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근거를 잡는 데에 주력했다. 그러나 근거는 전무하였다. 오히려 군경합동수사 결과 체포된 김덕승은 허위진술을 해버렸다.<ref>망향, 285쪽</ref><ref>"5.16 일주일 전에 나는 군 일부에서 군사 쿠데타 모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 전에도 2·3차 다른 부류의 쿠데타 모의가 있다는 미확인 정보를 입수하고 비밀리에 내사케 한 일이 있었다. 내사 결과 확실한 것이 아니라, 쿠테타 모의가 전연 없었는지 내사가 철저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그전의 2·3차 모의설은 불발이었다. 그러던 차 이것이 4번째의 정보였다. 나는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의 육군 참모 총장인 장도영을 불렀다. 내가 입수한 정보는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내가 입수한 정보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구 어느 중국 음식점에 몇몇이 모여 활약하고 있다는 내용도 알았다. … 나는 그에게 엄밀히 조사할 것을 단단히 부탁해두는 한편, 이 사건에 관련된 민간이도 확인해보라고 검찰에 명했다. 검찰로 말하더라도 그 무렵 2·3차나 그와 비슷한 정보를 입수하고 조사해본 일이 있었다. 이렇다 할 단서가 잡히지 않아 정보 사기꾼에 속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내 지시가 있은 지 며칠 후에 쿠데타 관련 민간인 혐의자 한 명을 체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심문해본 결과 끝내 만족할 만한 자백을 듣지 못했다 하여 결국 또 하나의 사기꾼으로 여기고 있었다. -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92~93쪽</ref>장도영 역시 백운상 대령을 대구로 내려보내 근거를 수집케 하였으나 쿠데타를 입증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얻을 수 없었다.<ref>"(5.16 5~6일전) 그의 보고는 결론적으로 박정희 소장 지휘하에 쿠데타를 하려 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데 그 세부방법과 조직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략… "증거라고는 박소장이 잘 다니는 중국요리집과 청수장이란 한식집에서 장교들과 식사를 하는 것 뿐인데 어떻게 합니까"하면서 오히려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 망향 287쪽</ref> 당시 미국 정보국과 장총리의 고문이였던 [[위태커]]는 정보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정보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정변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했을거라 보았지만<ref>{{서적 인용 |저자링크= 정대철 |제목=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날짜= 1997-09-05 |출판사= 동아일보사 |isbn= 978-89-7090-136-7 |쪽= 172~188}}</ref> 실상은 장도영도 육군방첩대장 이철희 준장에게 속아넘어가고 있었다. 이후 박정희는 해병대를 끌어들이는 한편 [[윤치영]], [[임영신]], [[임병직]] 등의 인사들과도 사전에 여러 번 교섭하였고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함으로써 5.16은 발각되지 않고 마침내 성공에 이르게 된다.
 
군 내부의 숨은 간첩 세력과 이것으로 인해 야기된 무정부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반란의정변의 원인으로 본다.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군사혁명위원회]]는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경제적 혼란으로 응축되어 있던 불만이 촉발된 성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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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
=== 반란정변 초기 ===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사 3-5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부사관]]과 [[병사 (군인 계급)|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문재준]] 대령 제6군단 포병단 지휘관과 [[박치옥]] 대령 등은 곧이어 박정희가 부의장으로 취임하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의장으로 추대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하고, 정변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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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 초기에 [[미국 육군 제8군|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 야전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였으나 美 정부의 신속한 지지 의사 표명, [[장면]] 내각의 책임 자각형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체념 등에 의하여 성공했다.
 
=== 반란정변 성공 후 윤보선의 활동 ===
[[파일:Yun Posun 1.jpg|섬네일|오른쪽|180px|[[대통령]]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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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로써 민의원, 참의원 및 지방의원 등 대의원 헌법기관은 해산되었고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ref>[[s: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제6호|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제6호]] 1961. 5.22 시행</ref>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어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면 내각은 붕괴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 이루어졌다. 군정기간 중 정변세력은 [[대한민국 특수범죄처벌법|특수범죄처벌법]], [[대한민국 정치활동정화법|정치활동정화법]] 등의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KCIA)|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제 복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하였다.
 
5·16 군사반란으로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의장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 국가재건최고회의 ===
{{본문|국가재건최고회의}}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미국과의 동맹강화·구악일소·경제재건 등을 공약으로 5·16 군사 반란에정변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군사반란군사정변 이후 반란정변 주도세력이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개편해 만든 통치기구이다.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통치기구였으며 [[1963년]] [[12월 17일]]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 5·16 군사 반란정변 직후 ===
[[파일:조리돌림.JPG|섬네일|300px|오른쪽|5·16 군사 혁명 이후 구악일소(舊惡一消)의 일환으로 육군 [[공수특전단]] 대원들에 의해 [[조리돌림]] 되는 [[이정재 (1917년)|이정재]] 外 폭력조직원]]
 
반란정변 당시 수많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군사반란을군사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도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ref>송건호 《송건호 전집:20 역사에서 배운다》(한길사, 1996) 295페이지</ref> 또한 정변 한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 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ref>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3801&sc=naver&kind=menu_code&keys=1</ref>
 
[[박정희]]는 반란정변 직후 독립운동가 [[김학규 (1900년)|김학규]]를 사면·복권시켰다.<ref name="안동의성1">[http://www.donga.com/fbin/output?exclusive=news&f=nes&n=200408170205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동아일보 2004-08-17일자</ref> 이후 그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에 지장이 생기자,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ref name="안동의성1"/>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하였다.<ref name="안동의성1"/> 또한 [[1962년]] [[3·1절|3월 1일]]과 [[광복절|8월 15일]] 독립운동가 2천여 명에 대한 포상을 단행했다.
 
== 평가와 비판 ==
 
* 좌익 언론인 [[함석헌]]은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쿠데타를 비판했지만, 큰 호응은 없었다.
* 반란정변 직후, 언론인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이를 '민족주의적 군사 혁명'으로 평가, 지지했다.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민정이양과 혁명과업 수행을 약속하였으므로, 이러한 기대감 속에 당대 지식인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등 요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 [[5.16]] 군사반란으로군사정변으로 세워진 [[국가재건최고회의]] 이후 박정희가 국민 직접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수차례의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수출중심주의의 고속성장 정책으로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최단시간 경제성장을 달성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기 때문에 성공한 이면이 있는 군사반란이라는군사정변이라는 평가가 있다.
 
== 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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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대통령 권한대행]]이자 [[국무총리|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국제연합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ref name="허정회고록289">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89페이지</ref>'고 주장했다.
 
정변 직후 [[허정]]은 정부에 전화하였지만 연결되지 못했다. [[허정]]에 의하면 국제연합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군사정변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정변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국제연합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ref name="허정회고록289" /> 반란정변 직후 [[허정]]은 [[장면]] [[국무총리|총리]]와 [[윤보선]]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에게 연락하였으나 모두 연락이 불통이었다.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 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군사정변의 저지를 위해 국제연합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반란이정변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ref name="허정회고록289"/>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ref name="허정회고록289"/> [[허정]]은 [[1963년]] 초의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이 점을 문제삼아 [[윤보선]]을 공격하여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 북한의 예측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5·16 군사 정변 발생 이전부터 남한에서 군사 정변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상황을 예의 주시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주재 [[중화인민공화국|중공]] 대사관이 정변 당일 작성한 〈남조선 군사 혁명 정황〉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 (1910년)|김일]] 부수상이 대사관 측과 만나 [[김일성]]의 위임에 의해 [[5월 16일]] 하오 [[중화인민공화국|중공]] 측에 반란에정변에 관한 정세를 설명하면서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군사정변이 박정희와 진보적인 군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기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라고 추정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특히 정변 발생 직후, 군사정변 주도세력을 남로당계로 보고 당일 지지성명까지 준비했지만 이틀 뒤인 [[5월 18일]] [[조선로동당|조선로동당 중앙상임위원회]] 회의에서는 "극심한 반동에 의한 쿠데타이며, 혁명 세력은 반동적인 친미 군인들"이라고 주장했다.<ref>{{뉴스 인용|언어 = ko|저자 = 신석호|제목 = 북한, 5·16군사정변 예측…당일 지지성명 준비했었다|url = http://news.donga.com/3/all/20091016/8882148/1|출판사 = 동아닷컴|날짜 = 2009-10-16}}</ref><ref>{{뉴스 인용|언어 = ko|저자 = 박성호|제목 = 북한, 5·16 쿠데타 '지지성명' 준비했었다…중국 외교문서|url = http://www.ytn.co.kr/_ln/0104_200910160107180232|출판사 = YTN|날짜 = 2009-10-16}}</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