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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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받다'라는 표현은 '서훈'과 '받다'가 서로 반대의 뜻을 가지므로 의미상 모순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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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경기도]] [[용인시|용인]] 출신<ref name="실록친일파"> {{서적 인용
[[경기도]] [[용인시|용인]] 출신으로 [[1895년]] [[일본]]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게이오의숙]]에서 수학했다. 당시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뽑아 보낸 관비 일본 유학생들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다양한 부문의 전문가이자 친일파로 활동하게 되는데, 장헌식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는 게의오의숙을 졸업하고 사법 부문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 사법성의 재판소 검사부에서 견습 사무원으로 일했고, [[도쿄 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행정법 전문가로 일본 대장성 총무국에서 견습 근무했다.
|저자=임종국
|기타=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제목=실록 친일파
|꺾쇠표=예
|발행일자=1991-02-01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서울
|id=ISBN 8971990368
|쪽=85~86쪽
[[경기도]]}} [[용인시|용인]] 출신으로</ref>으로 [[1895년]] [[일본]]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게이오의숙]]에서 수학했다. 당시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뽑아 보낸 관비 일본 유학생들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다양한 부문의 전문가이자 친일파로 활동하게 되는데, 장헌식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는 게의오의숙을 졸업하고 사법 부문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 사법성의 재판소 검사부에서 견습 사무원으로 일했고, [[도쿄 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행정법 전문가로 일본 대장성 총무국에서 견습 근무했다.
 
8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03년]] 귀국한 뒤로는 대한제국의 [[궁내부]]에서 주사로 관직을 시작했다. [[1905년]]에는 [[관립한성외국어학교]]의 교장과 학부 편집국장, [[역대 한성판윤|한성부윤]]을 역임했다. [[1907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였을 때는 훈3등 팔괘장을 받았고, 한성부윤으로 근무할 때인 [[1909년]]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 저격 당하자·살해하자 이토 추도회를 여러 차례 여는 등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전부터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의해그를 [[평안남도]] 초대 참여관에 임명되었고임명하였고, 이후 [[1917년]]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으로 승진한 뒤 [[1924년]]에는 [[전라남도]] 지사를 지냈다.
 
장헌식은 도 참여관, 도지사를 지낸 관료 가운데서도 [[1921년]] 총독부의 총독관방 근무 사무관(민정시찰 사무관을사무관)을 맡는 등 총독부와 특히 유착된 행보를 보였다. [[3·1 운동]] 후 신설된 이 직책은 독립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 {{서적 인용
|저자=반민족문제연구소
|제목=친일파 99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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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지고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설립된 친일 자본가 단체인 [[동민회]]에 가담했으며,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또다른 친일 단체 [[대화동맹]] 결성을 조종했다는 증언이 있다.<ref>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 반민특위 조병상 공판조서 (제1회) 중 조병상의 수기 (1949). </ref> 전남 지사직에서 물러난 1926년부터 1945년까지 중추원 칙임참의를 7회에 걸쳐 중임하였다.<ref name="실록친일파" />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ref> {{뉴스 인용
|저자=성강현
|제목=‘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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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
 
장헌식은 관직에서 퇴임한 뒤로도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을 후원한 활동을 인정 받아 [[1937년]] 일본 육군대신 명의의 표창을 받은 바 있고,<ref name="실록친일파" /> [[중일 전쟁]] 발발 이후로는 시국강연반에 가담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38년]]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국민총력 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조선 임전 보국단]]에도 가담했다. 이때는 이미 70대의 노구였으나, 학병 지원을 독려한다며 전국에서 강연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 식민 통치에 많은 공을 세워 [[1926년]]부터 [[1945년]] 광복 시점까지 19년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으며, 광복 당시에는 [[이왕직]] 장관으로 관직에 복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