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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활동 ===
==== 임진왜란 직후 ====
[[1599년]] [[3월]] [[병조]][[좌랑정랑]]을 거쳐 그해 [[5월]] 다시 [[황해도]] 도사로 나갔다. 그러나 그해 [[12월]] 한성부의 기생을 데리고 간 일로 [[사헌부]]와 [[사간원]]에게 계속 탄핵받고 파직당하고 만다. [[1600년]] 복직, [[춘추관]]기주관(記注官)과 [[세자시강원]]의 낭관과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그해 말 장생전(長生殿) 낭청이 되어 [[의인왕후]]의 [[국장도감]](國葬都監)과 빈전 행사에 참여하였다. [[의인왕후]]의 국장에 참여한 공로로 1601년 5월, 특별히 가자(加資)되었다.<ref>정삼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의 품계나 그런 품계를 올리던 일. 조선조에,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관원의 품계가 올라가다. 왕의 즉위나 왕자의 탄생과 같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거나 반란을 평정하는 일이 있을 때에 주로 행하였다.</ref>
 
1601년(선조 34년) 충청·전라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으로 부임한다. 전운판관이 되었을 때는 부안의 유명한 시인이자 기생인 [[매창]](梅窓)과 교류한다. 둘은 정신상 일에 중점을 두는 관계였다는 설과 매창이 그의 첩이었다는 설이 전한다. 후일 허균은 [[1609년]](광해군 1년) 매창에게 쓴 편지에 “그대는 성성옹(惺惺翁)이<ref>성소(惺所)</ref> 속세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분명히 웃을 걸세”라고 쓴다. 매창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겠다는 약속한 사정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약속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그만큼 위험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ref name="han11"/> 그러나 허균은 이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