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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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e Serment du Jeu de paume.jpg|섬네일|250px|테니스 코트의 서약]]
{{본문|삼부회|테니스 코트의 서약}}
[[루이 16세]]는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재정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재무 장관이었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해 특권 계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개혁안을 거부고거부하고,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1789년의 삼부회가 열리던 당시의 상황은 심각하였다. 1788년의 흉작과 혹독한 겨울로 인한 고통이 전국토를 휘감았다. 정부는 나약했으며 멸시받고 있었다. 관리들은 불복종이 표출되는 것을 진압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망설이고 있었다. 대의원들에게 주어진 서면 지시 사항은 정치적{{.cw}}사회적{{.cw}}경제적 관심들을 총망라한 것이었으며 아주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란 가운데, 왕과 그의 신하들은 여전히 수동적인 자세였다. 그들은 삼부회가 개별적으로 열려야 할지 아니면 함께 종합적으로 고민해야 할지 하는 문제도 결정하지 못했다.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전]]의 살 데 메뉘 플레지르(Salle des Menus Plaisirs)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였고,<ref>{{서적 인용 |저자 = Arthur William Holland |제목 = [[:en:s:1911 Encyclopædia Britannica/French Revolution, The#Opening of the States-General.|1911 Encyclopædia Britannica/The French Revolution]] |연도=1911 |장 = Opening of the States-General.|출판사 = | id= |쪽=|인용문 = The elections to the states-general of 1789 were held in unfavourable circumstances. The failure of the harvest of 1788 and a severe winter had caused widespread distress. The government was weak and despised, and its agents were afraid or unwilling to quell outbreaks of disorder. At the same time the longing for radical reform and the belief that it would be easy were almost universal. The cahiers or written instructions given to the deputies covered well-nigh every subject of political, social or economic interest, and demanded an amazing number of changes. Amid this commotion the king and his ministers remained passive. They did not even determine the question whether the estates should act as separate bodies or deliberate collectively. On the 5th of May the states-general were opened by Louis in the Salle des Menus Plaisirs at Versailles.(1789년의 삼부회가 열리던 당시의 상황은 심각하였다. 1788년의 흉작과 혹독한 겨울로 인한 고통이 전국토를 휘감았다. 정부는 나약했으며 멸시받고 있었다. 관리들은 불복종이 표출되는 것을 진압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망설이고 있었다. 이와 함께, 근본적인 개혁에 대한 갈망과 그 개혁이 쉬울 것이라는 신념이 일반적이었다. 대의원들에게 주어진 서면 지시 사항은 정치적{{.cw}}사회적{{.cw}}경제적 관심들을 총망라한 것이었으며 아주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란 가운데, 왕과 그의 신하들은 여전히 수동적인 자세였다. 그들은 삼부회가 개별적으로 열려야 할지 아니면 함께 종합적으로 고민해야 할지 하는 문제도 결정하지 못했다. 1789년 5월 5일 루이16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살 드 메뉘 플레지르에서 삼부회를 열었다. }}</ref> 귀족 188명, 성직자 247명, 평민 500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ref>디트리히 슈바니츠, 《교양-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들녘, 2004년, {{ISBN|89-7527-420-9}}, 219쪽 “…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1788년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했다. 이것은 1614년이 마지막으로 개최되었던 중세적 의회였다. 거기에서는 귀족, 교회와 일반 시민의 대표가 따로 모였다. ”</ref> 재무총감 [[네케르]]는 재정의 조건을 전제로, 몇 가지 작은 개혁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귀족, 성직자 대표와 평민 대표 간에 갈등이 생겼다. 국새상서(國璽尙書)인 샤를 루이 프랑소와 드 폴 드 바렝탕(Charles Louis François de Paule de Barentin)은 그들이 신분별로 또는 인원수대로 투표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제삼부회(Tiers État)는 회의를 개별적으로 할지 모여서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실망하였다. 귀족들 중 일부와 하위직 성직자들의 다수는 실질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제삼부회에 동의하였다고 알려졌다. 합동 회의를 개최한다면,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은 개혁, 특권의 폐지와 부동산에 대한 중세적 권리의 폐지를 통과시킬 것이었다. 분리 회의를 하는 경우, 귀족의 대부분과 상급 성직자는 개혁을 제한하려고 할 것이었다. 따라서, 삼부회를 합동으로 개최하자는 것이 제삼부회의 첫 번째 의제로 부각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 = Arthur William Holland |제목 = [[:en:s:1911 Encyclopædia Britannica/French Revolution, The#Opening of the States-General.|1911 Encyclopædia Britannica/The French Revolution]] |연도=1911 |장 = Opening of the States-General.|출판사 = | id= |쪽=|인용문 = Barentin, the keeper of the seals, informed them that they were free to determine whether they would vote by orders or vote by head. Necker, as director-general of the finances, set forth the condition of the treasury and proposed some small reforms. The Tiers État (Third Estate) was dissatisfied that the question of joint or separate deliberation should have been left open. It was aware that some of the nobles and many of the inferior clergy agreed with it as to the need for comprehensive reform. Joint deliberation would ensure a majority to the reformers and therefore the abolition of privileges and the extinction of feudal rights of property. Separate deliberation would enable the majority among the nobles and the superior clergy to limit reform. Hence it became the first object of the Tiers État to effect the amalgamation of the three estates.(국새상서(國璽尙書)인 샤를 루이 프랑소와 드 폴 드 바렝탕Charles Louis François de Paule de Barentin)은 그들이 신분별로 또는 인원수대로 투표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재무총감 네케르는 재정의 조건을 전제로, 몇 가지 작은 개혁안을 제안하였다. 제삼부회(Tiers État)는 회의를 개별적으로 할지 모여서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실망하였다. 귀족들 중 일부와 하위직 성직자들의 다수는 실질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제삼부회에 동의하였다고 알려졌다. 합동 회의를 개최한다면,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은 개혁, 특권의 폐지와 부동산에 대한 중세적 권리의 폐지를 통과시킬 것이었다. 분리 회의를 하는 경우, 귀족의 대부분과 상급 성직자는 개혁을 제한하려고 할 것이었다. 따라서, 삼부회를 합동으로 개최하자는 것이 제삼부회의 첫 번째 의제로 부각하였다. }}</ref>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회의를 이끄려고 한 것이다.
 
평민 대표들은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1789년 [[6월 20일]] 회의장을 테니스 코트 건물로 옮기고, 요구가 승인되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이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국민의회 (프랑스 혁명)|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테니스 코트의 서약]]). 국민의회에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던 [[로마 가톨릭]] [[사제]]와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합류하였다. [[7월 9일]]에는 [[제헌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 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