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모 소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38번째 줄:
== 약력 ==
=== 가독 상속 ===
오토모 가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쳐 [[쇼니다자이후 가문]]쇼니(少弐), [[시마즈사쓰마 가문]]시마즈(島津)과 더불어 [[막부]]의 [[고케닌]](御家人)으로서 권세를 누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는 [[오우치 가문]](大内氏)의 규슈 진출에 대항하여 쇼니 가문과 연합하여 대항하였다.
 
오토모 소린은 고로쿠[[교로쿠]](享禄) 3년([[1530년]]) 1월 3일、오토모 씨 20대 당주 ・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의 차남이자 적남(嫡男)으로써 [[분고 국]](豊後国) 고쿠후 내에서 태어났다. 관례를 올린 뒤에는 '''요시자네(義鎮)'''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어머니는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의 딸로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의 누나이다. [[스오 국|스오]] 오우치 가문의 가독을 이은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와 소린이 이복형제 간이라는 말도 있는데, [[구게]](公家) 출신의 딸 또는 가신의 딸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일설에 따르면 생모는 [[아소 고레노리]](阿蘇惟憲)의 딸이라고도 한다. 후야쿠(傅役)는 중신(重臣) ・ 뉴다 지카자네(入田親誠)가 맡았다.
 
아버지 요시아키는 요시오키의 이복 동생으로 [[오토모 시오이치마루|시오이치마루]](塩市丸)에게 가독을 넘겨주기로 계획하고 후야쿠 뉴다 지카자네와 함께 요시자네를 폐적(廃嫡)하려 했다. [[덴분]](天文) 19년([[1550년]]) 2월에 요시자네를 강제로 벳푸(別府)의 하마와키(浜脇)로 탕치(湯治, 온천 치료)를 보내놓은 사이에 요시자네파였던 다구치 쿠란도노스케 아키치카(田口蔵人佐鑑親)、쓰구미 미마사카(津久見美作, 실명은 알 수 없다)나 사이토 나가자네(齋藤長実)、오자이 야마토노카미(小佐井大和守)의 숙청을 계획하다가 이를 사전에 파악한 요시자네파 중신들이 모반을 일으켜 2월 10일에 시오이치마루와 그 어머니를 죽였고, 요시아키도 부상을 입고 2월 12일에 사망하였다(닛카이쿠즈레의 변二階崩れの変). 이를 계기로 요시자네가 요시아키의 유언을 받드는 형식으로 오토모 집안의 가독을 상속해 21대 당주가 되었다. 동시에 뉴다 등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요시아키 암살」의 주모자로 몰아서 숙청하였다.
 
=== 세력 확대 ===
덴분 20년([[1551년]]) 스오에서 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인 스에 다카후사(陶隆房)의 모반으로 자결하고 요시자네는 다카후사의 요청으로 동생 하루히데(晴英, 오우치 요시나가)를 오우치 씨의 새로운 당주로 받들어 보냈다. 이로써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내내 지속되었던 오우치와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고 기타큐슈에서 오우치에 복속해 있던 고쿠진들이 오토모 가문으로 복속하게 되어 스오 ・ 나가토 방면으로도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대중국 교역의 거점이자 규슈 최대의 항구도시였던 하카타를 얻은 것은 오토모 가문에 있어서 큰 이익이었다. 고지(弘治) 3년([[1557년]])에 연합으로 중국 [[명나라|명]](明)에 파견한 견명선(遣明船)으로 요시자네는 왜구금제사(倭寇禁制使) 장주(蔣洲)를 호송해 감합(勘合)을 반포해 줄 것을 요청했고, 요시자네는 왜구에게 잡혀갔던 피로인을 송환하면서 「일본국왕」(日本国王)의 도장을 사용해 명에 조공하였다(이 도장은 모리 박물관毛利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복권을 노리던 숙부 기쿠치 요시타케(菊池義武)의 반란을 격퇴, 덴분 23년([[1554년]]) 기쿠치 씨(菊池氏)를 멸망시키고 히고 국(肥後国)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비명의 죽음, 나아가 요시자네가 당시 예수회를 통해 일본에 들어 온 기리시탄(크리스트교)에 관심을 보이며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오토모 가문의 영내에서의 크리스트교 포교를 허가한 것이 오토모 가문 가신단의 종교 대립으로 이어져, 덴분 22년([[1553년]])에 이치마다 아키스케(一萬田鑑相, 훗날 측실이 되는 이치마다 부인一萬田夫人이나 이치마다 아키자네一萬田鑑実의 아버지)와 무나카타 아키히사(宗像鑑久) 형제와 후쿠베 우쿄노스케(服部右京亮)、[[고지(연호)|고지]](弘治) 2년([[1556년]])에는 오하라 아키모토(小原鑑元)가 모반을 일으키는 등(성씨대립사건姓氏対立事件) 요시자네의 치세는 초기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또한 이 무렵에 요시자네는 본거지를 후나이(府内)에서 뉴지마 성(丹生島城, 우가키 성臼杵城)으로 옮겼다.
 
나아가 고지 3년([[1557년]])、오우치 요시나가가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침공으로 자결하고 오우치 가문이 멸망하면서 오토모 가문은 스오 방면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모토나리가 기타큐슈로 진출해 오면서 요시자네는 모리 가문과의 대립을 결의하고 이와 내통하던 [[지쿠젠 국]](筑前国)의 아키즈키 후미타네(秋月文種)를 멸망시키는 등 기타큐슈에서의 옛 오우치 영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덴분 23년([[1554년]])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제13대 쇼군 ・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에게 철포(鉄砲)나 화약 조합서를 바치는 등 아시카가 쇼군가와의 관계를 강화해나갔다강화해 나갔다. [[에이로쿠]](永禄) 2년([[1559년]]) 요시테루에게 많은 헌금 운동을 펼쳐 같은 해 6월에는 부젠 ・ 지쿠젠의 슈고(守護)로 임명되고, 11월에는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보임되었다.
 
에이로쿠 3년([[1560년]])에는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로 임관하였다. 이리하여 요시자네는 명실공히 규슈에서의 최대 판도를 쌓아올렸고 오토모 가문의 전성기를 창출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에이로쿠5년에이로쿠 5년([[1562년]])에는 모지 성(門司城) 전투에서 모리 모토나리에게 패배하였고, 같은 해에 출가해 '''휴안 소린(休庵宗麟)'''이라 하였다. 그 뒤로도 소린은 아시카가 쇼군 가문에 대한 많은 원조를 지속했고 에이로쿠 6년([[1563년]])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쇼반쥬(相伴衆)에 임명되었으며, 에이로쿠 7년([[1564년]]) 요시테루에게 모리 가문과의 화친을 조정해 줄 것을 의뢰하고 기타큐슈에서 오토모 가문의 권익 확보를 실현시키는 등 관계는 깊어지게 되었다.
 
모리 가문은 [[산인도|산인]](山陰) 방면의 [[이즈모 국|이즈모]]의 아마고 씨(尼子氏) 집안을 멸망시키고 다시금 기타큐슈를 잠식해나가면서 양자간의 화친도 깨졌다. 에이로쿠 10년([[1567년]])、부젠이나 지쿠젠 국에서 오토모측 고쿠진이 모리 모토나리와 내통해 봉기하였는데, 여기에는 오토모 가문의 중신 다카하시 아키타네(高橋鑑種)도 가담하였다. 소린은 [[다치바나 도세쓰]](立花道雪) 등에게 명해 이를 평정하게 하였다. 또한 이때의 모리 가문과의 전투 와중에 소린은 예수회 선교사에게 철포에 사용되는 화약 원료인 초석의 수입을 요청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나는 크리스트교를 보호하는 사람이고 모리 가문은 크리스트교를 탄압하는 놈들이다. 이들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오토모 가문에 양질의 초석을 제공하되 모리 가문에는 초석(硝石)이 수입되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는 편지를 보내고 있다. 에이로쿠 12년([[1569년]])、[[히젠 국|히젠]](肥前)에서 세력을 확대하던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를 치기 위해 자신이 군세를 이끌고 쳐들어 갔으나, 모토나리가 지쿠젠을 침공하는 바람에 황급히 돌아와야 했고, 다타라하마 전투(多々良浜の戦い)에서 모리 군에 타격을 입히는 한편으로 중신 요시오카 나가마스(吉岡長増)의 진언을 받아들이고 오우치 잔당인 오우치 데루히로(大内輝弘)에게 수군중(水軍衆) 와카바야시 사네오키(若林鎮興)를 딸려주어 스오에 상륙시켜 모리 가문의 후방을 노리게 했고, 모토나리는 [[아키 국|아키]](安芸)로 물러났다(오우치 데루히로의 난).
60번째 줄:
 
=== 패전 ===
겐키(元亀) 원년([[1570년]]), 다시금 히젠으로 쳐들어 갔으나 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에서 류조지 다카노부에게 동생 지카사다(親貞)를 잃었다. 류조지 가문에 있어서 이마야마에서의 승리는 국지적인 것일 뿐이었고, 이 시점에서 이미 오토모 가문의 히젠 지배를 막을 수는 없었고, 오토모 가문도 지쿠고(筑後)나 히젠의 반류조지 세력을 부추겨서 류조지에 적대하게 했지만 류조지 가문의 세력 팽창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덴쇼 4년([[1576년]]), 소린은 오토모 가문의 가독을 장남 요시무네(義統)에게 넘겨주고 은거한다. 이때부터 소린과 요시무네 부자의 이원정치가 개시되었다. 이듬해인 덴쇼 5년(1577년),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사가 [[휴가 국]](日向国) 침공을 개시하고, 소린도 출전하였다. 하지만 덴쇼 6년([[1578년]])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에서 시마즈에 패하고 많은 중신들을 잃었다.
 
미미가와 전투가 발발한 원인인 시마즈 군세의 북상의 한 요인으로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에게로 망명해 와 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영향을 지적하는 설이 있다. 요시아키가 모리 가문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끝끝내 모리 가문이 그를 받들고 상경하지 못한 것은 오토모 소린이 배후에서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때 시마즈 가문을 비롯해 류조지나 죠소카베(長宗我部氏) 등의 가문에 오토모 가문을 공격하도록 외교 공작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소린은 쇼군의 상경을 방해하는 「6개 구니의 흉도」(六ヶ国之凶徒)로 규탄받게 되었고 주변 다이묘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리게 된다. 소린은 오다 정권(織田政権)에 접근해 이를 타파해보고자 했지만, 덴쇼 7년([[1579년]]) 무렵부터는 기쿠치 씨(蒲池氏) ・ 구사노 씨(草野氏) ・ 구로키 씨(黒木氏) 등 지쿠고 각지 세력들이 오토모 가문의 영향으로부터 이탈하고 가독을 상속받은 요시무네 역시 아버지와의 이원정치에서의 확집으로 대립이 깊어지는 등 이후 오토모 가문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 쇠퇴와 죽음 ===
 
한편 미미가와 전투 직전인 7월에 소린은 선교사 프란시스코 카브랄(Francisco Cabral)로부터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키리시탄이 되었다. 세례명은 「돈 프란시스코」(ドン・フランシスコ, Don Francisco)라 하였으며, 이후 가신들에게 보내는 서장 등에서는 이 세례명을 한자로 음차표기한 「프란」(府蘭)이라는 서명을 사용하였다.
 
=== 쇠퇴와 죽음 ===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