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모 소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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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퇴와 죽음 ===
미미가와 전투 이후 오토모 가문의 영내 각지에서 고쿠진들의 반란이 잇따랐고, 시마즈 요시히사나 류조지 다카노부、아키즈키 다네자네(秋月種実) 등의 침공으로 영토는 침식되어 갔다. 소린은 혼슈(本州)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접근해 시마즈 가문과의 화의를 알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아가 노부나가의 모리 공격에게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덴쇼 12년([[1584년]])에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류조지 다카노부가 시마즈 요시히사의 동생 ・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에게 패하고 전사하자, 다치바나 도세쓰에게 명해 지쿠고를 쳐서 오토모 가문이 예전 점령했던 지쿠고의 태반을 오토모 가문의 영지로 탈환하였다. 그러나 덴쇼 13년(1585년)에 도세쓰는 병사했고 시마즈 요시히사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겨 북상을 개시한다. 가신 다카하시 쇼운(高橋紹運) ・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부자의 분전으로 시마즈 군세의 침공을 늦추었으나(이와야 성 전투岩屋城の戦い)、오토모 가문 단독으로 시마즈 군세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때문에 덴쇼 14년(1586년)、소린은 중앙에서 통일정책을 추진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찾아가 알현하고 도요토미 가문의 산하에 들어 가는 것을 조건으로 군사적인 지원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이에 시마즈 요시히사는 그 뒤로도 오토모 가문 영지를 침공했고(부사쓰 합전豊薩合戦)、같은 해 12월에는 시마즈 이에히사의 군이 戸次川の戦い에서 오토모 가문을 구원하러 왔던 도요토미 군세의 선발대를 궤멸시키고 나아가 오토모 가문의 본거지였던 분고의 후나이까지 공략해 왔다. 우가키 성에서 농성하던 소린은 남만으로부터 수입해 온 대포 ・ 구니쿠즈시(国崩し, [[불랑기포]])를 써서 우가키 성을 지켜냈다. 그러나 오토모 가문은 기껏해야 몇 달밖에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고, 멸망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덴쇼 15년(1587년)、멸망 직전에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의 군세가 부젠(豊前) 고쿠라(小倉)에 와서 먼저 와 있던 모리 데루모토、미야베 게이준(宮部継潤)、[[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의 군세와 합류해 도요토미 군세 총 10만 명이 규슈에 도착했다. 4월 17일 휴가(日向)의 와지로자카(根城坂)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세와 시마즈 요시히사 군세의 합전이 벌어졌다(와지로자카 전투). 요새를 지키던 미야베 게이준 등을 중심으로 하는 1만 군세가 해자를 파고 널빤지로 목책을 세우는 등 요새를 굳게 지켰고, 시마즈 군세는 이를 돌파하지 못한 채 교착 상태에 있던 차에 히데나가 휘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5백 명과 우키타 히데이에 휘하 [[도가와 미치야스]](戸川達安)의 수세(手勢) 등이 죽기로 싸워서 게이준을 구원하였다. 결과 시마즈 군세는 요시히사의 외손자인 시마즈 다다치카(島津忠隣)、사루와타리 노부미쓰(猿渡信光)가 전사하는 등 큰 손해를 입고 패주하였다. 이 전투는 「분고에서 굳게 방어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고 멋대로 회전을 벌였다(헤쓰기가와 전투戸次川の戦い) 패주했던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의 실패를 만회하고 히데요시에 의한 규슈 평정(九州平定) 사업을 반석에 올릴 수 있도록 했으며, 궁지에 빠져 있던 오토모 소린을 구원하였다.
 
5월 13일、히데요시는 히데나가에게 전11개조의 명령을 하달하였다. 오스미(大隅) ・ 휴가 양국의 인질들을 풀어줄 것과, 죠소카베 노부치카(長宗我部信親)의 전사를 애도하는 뜻에서 그 아버지 [[조소카베 모토치카|모토치카]](元親)에게 오스미를 내린다는 것, 시마즈 요시히사 항복의 様子、모리 데루모토、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깃카와 모토나가(吉川元長)를 사쓰마로 진을 옮기게 할 것, 시가 지카쓰구(志賀親次)의 충절에 대한 보답으로 오토모 소린의 判断で 휴가 국내에 성을 사여할 것, 오토모 요시무네와 상담해 분고 국내의 불필요한 성은 파각할 것, 휴가 국에 있어서 오토모 소린의 지행(知行) 취급과 처분을 소린의 뜻대로 맡길 것、우키타 히데이에, 미야베 게이준,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비토 토모노부(尾藤知宣), 구로타 다카타카(黒田孝高)에게 휴가、오스미、분고의 성곽 공사 및 수리를 명할 것、부젠의 불필요한 성을 파각하고 분고 ・ 부젠 사이에 성 하나를 구축할 것、월권행위를 하지 말 것 등이었다(『오토모 가 문서록』大友家文書録).
 
소린은 전쟁 국면이 한번에 역전되고 있는 와중에 병으로 쓰러졌고, 시마즈 요시히사의 항복 직전에 분고의 쓰구미(津久見)에서 병사하였다. 향년 58세로 사인은 티푸스가 유력하다.
 
규슈 평정 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요시무네는 분고 1국을 안도받았다. 히데요시는 소린에게 휴가 국을 사여하려 했지만 통치 의욕을 잃었던 소린은 이를 사양하였다(그 명령을 받기 그 직전에 사망하였다고도 한다).
 
오토모 소린의 무덤은 오이타 현(大分県)의 쓰구미 시(津久見市) 시내와 교토 시(京都市) 기타구(北区)의 류호산(龍寶山) 다이토쿠지(大徳寺)의 탑두사원(塔頭寺院)인 서봉원(瑞峯院)에 위치해 있다. 나아가 쓰구미 시 가미미야모토 정(上宮本町)의 히비키류 산(響流山) 초센지(長泉寺)에 위패가 있다. 오토모 소린의 초상화는 서봉원에 소장되어 있다.
 
소린의 죽음 직후 크리스트교의 방식에 따라 장례가 치러져서 묘소가 그 자신의 저택에 마련되었으나, 훗날 요시무네가 다시 후나이의 다이와지(大知寺)에서 불교식으로 장례를 거행하고 묘지도 불교식으로 바꿨다. 그 뒤 오토모 소린의 무덤은 황폐해졌으나 에도 시대인 간세이(寛政) 연간(1789~1801년)에 소린의 가신의 먼 후손인 우가키 시로토요(臼杵城豊)가 자비를 들여서 개장하였다. 쓰구미 시내에 위치한 현재의 오토모 소린의 묘소는 1977년에 당시 오이타 시장 우에다 타모쓰(上田保)에 의해 새롭게 크리스트교 방식의 무덤으로 조성되어 종래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이다.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