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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괴월(蒯越)
▲{{정치인 정보
|그림=
|그림설명=
|출생지= [[남군 (중국)|남군]] 중려
|사망원인= 병사
▲ | 사망일 = ?
|국적= [[후한]]
|별칭= 자(字)는 이도(異度)
|경력= 대장군 동조연 → 여양현령 → 장릉태수 → 광록훈
|직업= [[정치가]]
|작위= 번정후
|관련활동= [[형주]]의 명사
}}
'''괴월'''(蒯越, ? ~ [[214년]])은 [[중국]] [[후한]] 말 [[유표]] 휘하의 [[정치가]]로 [[자 (이름)|자]]는 이도(異度)이며 [[형주]] [[남군 (중국)|남군]] 중려현(中廬縣)<ref name='전략'>[[사마표]], 《전략》(戰略)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에서 인용</ref> [[사람]]이다. [[전한]] [[한신 (회음후)|한신]]의 부하 [[괴철]]의 후손이다. [[괴량]]과의 관계는 알 수 없다. 형주의 명사로서 형[[자사 (관직)|주목]] 유표를 도와 혼란을 수습하고 [[평화]]를 추구하였다. [[조조]]는 형주를 손에 넣으면서 괴월을 치켜세웠다.
==
=== 혼란에 휩싸인 형주 ===
[[대장군]] [[하진]]이 명성을 듣고 등용하여 그 동조연(東曹掾)이 되었다. [[환관]]들을 제거하라는 진언을 올렸으나 하진이 머뭇거리자 그의 어두운 [[미래]]를 예견하고 여양[[현령]](汝陽―)으로 내려갔다. [[190년]]([[초평]] 원년) [[반동탁 연합군]]이 궐기하여 [[후장군]] [[원술]]이 [[남양군 (중국)|남양]]의 병력을 끌어갔다. [[장사군]]에서는 소대(蘇代)가 일어나 패우(貝羽)를 화용[[현령|현장]](華容―)으로 삼는 등 [[장강]] 이남의 토호들도 저마다 할거하였다. [[형주]][[자사 (관직)|자사]] [[왕예]]는 이미 [[손견]]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임 [[유표]]는 군대가 없어서 장강 이남에 있는 형주의 주도(州都) [[무릉군]] 한수현(漢壽縣)<ref>사마표, 《[[속한지]]》22권 군국 제4 형주 무릉군</ref> 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홀로 [[남군 (중국)|남군]] [[이청 시|의성]]현(宜城縣)으로 들어가 [[괴량]], 괴월, [[채모]]를 청한 후 그 대책을 토의하였다.
=== 구범의 책략 ===
유표는 토호들이 원술과 [[손]]잡을 것을 우려했는데 병사들마저 잘 모이지 않았다. 이에 괴량은 인의지도를 행한다면 [[물]]이 아래로 흐르듯 저절로 백성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한 반면, 괴월은 치세에는 인의, 난세에는 권모를 앞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제게 똑똑한 부하가 있어서 이로 하여금 이익을 보여 꼬신다면 각 우두머리들이 무리를 이끌고 올 것입니다. 그중에 무도한 자는 처단하고 나머지는 위무하고 등용한다면 그 위엄과 덕망이 [[주 (행정 구역)|주]]에 퍼져 반드시 사람들이 몰려와 귀부할 것입니다. 그 병사로 남쪽으로는 강릉(江陵,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구]])을 점거하고 북쪽으로는 [[샹양 시|양양]]을 지킨다면 가히 격문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형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원술은 오더라도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언어|말]]하였다.
유표는 괴량의 발언은 옹계(雍季)의 구상이고 괴월의 계책은 구범(臼犯)의 꾀, 즉 괴량은 장기 대책, 괴월은 단기 대책이라 평하며 괴월로 하여금 각 토호의 우두머리들을 유인하게 한 후 모두 참하고<ref>《전략》에서는 55인, 《후한서》에서는 15인</ref> 그 휘하 무리를 흡수하였다.<ref name='전략' /> 오직 장호(張虎)와 진생(陳生)만이 양양을 끼고 버텼는데 괴월과 방계(龐季)가 타이르니 [[항복]]하였다. 강남 일대를 평정한 공으로 번정후(樊亭侯)에 봉해지고 장릉[[태수]](章陵―)가 되었다.
===
[[원소 (후한)|원소]]와 [[조조]]가 [[관도 대전|격돌할]] 무렵 조조에게 귀부할 것을 별가(別駕) [[유선 (시종)|유선]], 종사중랑(從事中郞) [[한숭]]과 함께 권하였다. 유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208년]]([[건안]] 13년) 조조가 형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마침 유표가 [[질병|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 [[유종 (후한)|유종]]이 뒤를 이었다.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유종을 한숭, 동조연 [[부손]] 등과 함께 설득했다. 결국 유종은 조조에게 굴복하였고 괴월은 [[광록훈]]을 받았다. 214년 [[사망]]하며 조조에게 집안을 부탁하였다.
==
으뜸가는 호걸로서 지략이 충만하고 위풍당당하였다. 조조는 [[순욱]]에게 형주를 얻은 것보다 괴월을 얻은 것이 더 기쁘다고 하였다.
==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괴량]]의 [[동생]]으로 나온다. [[손견]]이 [[전국새]]와 야망을 품에 숨기고 [[반동탁 연합군]]에서 나와 강동으로 돌아갈 때 [[유표]]의 명령을 받고 [[채모]]와 함께 손견을 막아 공격한다.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던 [[유비]]가 장무(張武)와 진손(陳孫)을 토벌하고 취한 [[말 (동물)|말]] [[적로]]를 유표에게 바친다. 괴월은 주인을 해칠 말이라면서 유표에게 타지 말라고 한다. 유비가 훗날 화가 될 것이라 여긴 채모는 유비 암살을 준비하고 유표의 명령이라 속여 괴월을 동참시킨다. 괴월은 [[문빙]]과 [[왕위]]로 하여금 다른 자리를 마련해 [[조운 (촉한)|조운]]을 유비로부터 떼어놓으라 제안한다. 유비는 [[이적 (촉한)|이적]]의 귀띔으로 무사히 빠져나와 적로를 타고 단계(檀溪)를 뛰어넘는다.<ref>채모와 괴월의 유비 암살 미수 일화는 〈선주전〉에 인용된 《세어》(世語)에서 비롯된 일화이다.</ref>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부손, [[왕찬]]과 함께 유종에게 권하고, 이후 강릉태수와 번성후(樊城侯)를 받는다.
== 가계 ==
[[파일:괴철.png]]
== 각주 ==
<references/>
== 참고 문헌 ==
*《부자》(傅子)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에서 인용
*《[[후한서]]》74권下 열전 제64下 유표
{{삼국지 주요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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