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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인물 정보
{{출처 필요|날짜=2013-6-28}}
|이름= 괴월(蒯越)
{{정치인 정보
|그림=
| 이름 = 범여 <br /> 范蠡
|그림설명=
| 국적 = [[초 (춘추 전국)|초나라]] → [[월 (춘추 전국)|월나라]]
|출생지= [[남군 (중국)|남군]] 중려
| 출생일 = [[기원전 517년]]
| 사망일 = ?[[214년]]
| 출생지 = [[초 (춘추 전국)|춘추 전국 시대 초나라]] [[난양 시|완지]]
|사망원인= 병사
| 사망일 = ?
|국적= [[후한]]
| 직업 = [[문신 (관료)|문관]], 군인, 경제학자, 군사학자, [[정치가]]
|별칭= 자(字)는 이도(異度)
| 경력 = [[월 (춘추 전국)|춘추 전국 시대 월나라]]의 책사급 모신
|경력= 대장군 동조연 → 여양현령 → 장릉태수 → 광록훈
|직업= [[정치가]]
|작위= 번정후
|관련활동= [[형주]]의 명사
}}
'''괴월'''(蒯越, ? ~ [[214년]])은 [[중국]] [[후한]] 말 [[유표]] 휘하의 [[정치가]]로 [[자 (이름)|자]]는 이도(異度)이며 [[형주]] [[남군 (중국)|남군]] 중려현(中廬縣)<ref name='전략'>[[사마표]], 《전략》(戰略)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에서 인용</ref> [[사람]]이다. [[전한]] [[한신 (회음후)|한신]]의 부하 [[괴철]]의 후손이다. [[괴량]]과의 관계는 알 수 없다. 형주의 명사로서 형[[자사 (관직)|주목]] 유표를 도와 혼란을 수습하고 [[평화]]를 추구하였다. [[조조]]는 형주를 손에 넣으면서 괴월을 치켜세웠다.
'''범려'''(范蠡, 기원전 517년 ~ ?)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군인 겸 정치가이며, 자는 소백(少伯)이다. 전언에 따르면, 초 평왕 20년인 [[기원전 517년]]에, 현 하남성 남양인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완지 출신으로, 초나라 초기 가장 유명한 정치가, 군사가, 경제학자였다. 월나라 왕 [[구천]]을 섬기고 구천을 [[춘추오패]]에 설 수 있기까지 기여한 공로가 가장 크다.
 
== 월나라생애 ==
=== 혼란에 휩싸인 형주 ===
범려가 어디에서 출생하고 어떻게 월에서 벼슬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웃 오나라 왕 [[합려]]가 [[오자서]], [[손무]]에게 도움받아 국력을 신장하자 패권 경쟁에서 밀리면 곧 멸망하던 시기의 월나라도 국력 신장에 최선을 다한다. 결국 오나라가 흥사(興師)하여 월나라를 침범하였지만, 기발한 계책으로 오나라를 패퇴시킨다. 범려는 자살 특공대를 조직하여 적의 눈 앞에서 목을 스스로 베게 한다. 경악하는 오나라 군대를 급습하여 [[합려]]를 상처 입히고 오나라 군대를 초토화시킨다. 이 상처로 합려는 결국 죽는다.
[[대장군]] [[하진]]이 명성을 듣고 등용하여 그 동조연(東曹掾)이 되었다. [[환관]]들을 제거하라는 진언을 올렸으나 하진이 머뭇거리자 그의 어두운 [[미래]]를 예견하고 여양[[현령]](汝陽―)으로 내려갔다. [[190년]]([[초평]] 원년) [[반동탁 연합군]]이 궐기하여 [[후장군]] [[원술]]이 [[남양군 (중국)|남양]]의 병력을 끌어갔다. [[장사군]]에서는 소대(蘇代)가 일어나 패우(貝羽)를 화용[[현령|현장]](華容―)으로 삼는 등 [[장강]] 이남의 토호들도 저마다 할거하였다. [[형주]][[자사 (관직)|자사]] [[왕예]]는 이미 [[손견]]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임 [[유표]]는 군대가 없어서 장강 이남에 있는 형주의 주도(州都) [[무릉군]] 한수현(漢壽縣)<ref>사마표, 《[[속한지]]》22권 군국 제4 형주 무릉군</ref> 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홀로 [[남군 (중국)|남군]] [[이청 시|의성]]현(宜城縣)으로 들어가 [[괴량]], 괴월, [[채모]]를 청한 후 그 대책을 토의하였다.
 
=== 구범의 책략 ===
합려 사후 왕위를 계승한 오나라 왕 [[부차]]는 오자서에게 도움받아 복수할 칼날을 간다. 오나라의 복수를 두려워한 구천은 오나라를 미리 침략하려 한다. 범려가 만류해도 월왕 [[구천]]은 출병하여 대패한다. 월왕 구천은 부차에게 머리를 조아려서 신하를 자처하고, [[문종 (춘추 전국 시대 월나라)|문종]](文種)은 구천을 구명하려고 부차의 측근인 재상 [[백비]](伯嚭)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설득하는 때 오자서는 부차에게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적극 간언하지만, 부차는 빼어난 미인인 [[서시 (사람)|서시]]까지 바친 [[월나라]]를 속국으로 삼는 선에서 끝낸다.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이 서로 복수를 다짐한 데서 [[와신상담]]의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유표는 토호들이 원술과 [[손]]잡을 것을 우려했는데 병사들마저 잘 모이지 않았다. 이에 괴량은 인의지도를 행한다면 [[물]]이 아래로 흐르듯 저절로 백성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한 반면, 괴월은 치세에는 인의, 난세에는 권모를 앞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제게 똑똑한 부하가 있어서 이로 하여금 이익을 보여 꼬신다면 각 우두머리들이 무리를 이끌고 올 것입니다. 그중에 무도한 자는 처단하고 나머지는 위무하고 등용한다면 그 위엄과 덕망이 [[주 (행정 구역)|주]]에 퍼져 반드시 사람들이 몰려와 귀부할 것입니다. 그 병사로 남쪽으로는 강릉(江陵,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구]])을 점거하고 북쪽으로는 [[샹양 시|양양]]을 지킨다면 가히 격문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형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원술은 오더라도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언어|말]]하였다.
 
유표는 괴량의 발언은 옹계(雍季)의 구상이고 괴월의 계책은 구범(臼犯)의 꾀, 즉 괴량은 장기 대책, 괴월은 단기 대책이라 평하며 괴월로 하여금 각 토호의 우두머리들을 유인하게 한 후 모두 참하고<ref>《전략》에서는 55인, 《후한서》에서는 15인</ref> 그 휘하 무리를 흡수하였다.<ref name='전략' /> 오직 장호(張虎)와 진생(陳生)만이 양양을 끼고 버텼는데 괴월과 방계(龐季)가 타이르니 [[항복]]하였다. 강남 일대를 평정한 공으로 번정후(樊亭侯)에 봉해지고 장릉[[태수]](章陵―)가 되었다.
== 오의 멸망 ==
거짓된 충성심을 보여주고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범려와 문종에게 보좌받아 복수할 저력을 키우면서 밖으로는 부차에게 순종하는 모습만 보여줘 방심을 유도하는 데다가 범려는 백비에게 뇌물을 계속 보내서 부차와 오자서를 이간하게끔 유도한다. 결국 부차는 오자서를 죽이고 [[월나라]] 군대는 부차가 출병한 틈을 타 오를 급습하여 황자를 죽이고 4년 후 부차를 궁지에 몰아넣어 자살하게 한다.
 
=== 은퇴항복합시다 ===
[[원소 (후한)|원소]]와 [[조조]]가 [[관도 대전|격돌할]] 무렵 조조에게 귀부할 것을 별가(別駕) [[유선 (시종)|유선]], 종사중랑(從事中郞) [[한숭]]과 함께 권하였다. 유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208년]]([[건안]] 13년) 조조가 형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마침 유표가 [[질병|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 [[유종 (후한)|유종]]이 뒤를 이었다.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유종을 한숭, 동조연 [[부손]] 등과 함께 설득했다. 결국 유종은 조조에게 굴복하였고 괴월은 [[광록훈]]을 받았다. 214년 [[사망]]하며 조조에게 집안을 부탁하였다.
대업이 달성되어 득의양양한 구천을 보고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은거한다. 범려는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 “새 사냥이 끝나면 활이 필요없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긴다.”([[토사구팽]]<ref> 《[[사기 (역사서)|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 따르면, “蜚鳥盡 良弓藏 狡兔死 走狗烹 (벌레를 먹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이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가 삶긴다.)”라고 했으며,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따르면, “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我固當烹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가 삶기고, 날아다니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이 감추어지며, 적국이 타파되면 모신도 망한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도 마땅히 삶기는구나)”라고 [[한신 (전한)|한신]]이 한탄하였다고 한다. </ref>)라고 설명하고서, 월 왕은 고난은 같이할 수 있어도 영광을 함께 향유할 수 없는 상(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칭병하고 은퇴하라고 권유한다. 범려의 편지를 받고서 [[월나라|월]]을 떠나기를 주저하던 문종은 구천에게 반역을 의심받아 결국 자결하였다.
 
== 전설평가 ==
으뜸가는 호걸로서 지략이 충만하고 위풍당당하였다. 조조는 [[순욱]]에게 형주를 얻은 것보다 괴월을 얻은 것이 더 기쁘다고 하였다.
월을 탈출한 범려는 이름을 바꾸고 장사해서 막대한 부를 얻었다. 범려의 이름을 들은 제는 범려에게 재상 자리를 권유하지만, 범려는 고명이 불행의 원인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재산을 분배하고 재차 도망간다. 제에서 도망한 범려는 조로 와서 현재 산동성 도현으로 거처를 옮기고 도주공이라고 자칭했다. 여기서도 장사에 성공하여 막대하게 축재하였는데 늙어서 은퇴한 후 유유자적하였다. 『[[사기 (역사서)|사기]](史記)』의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전설을 언급한다.
 
== 함께보기삼국지연의 ==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괴량]]의 [[동생]]으로 나온다. [[손견]]이 [[전국새]]와 야망을 품에 숨기고 [[반동탁 연합군]]에서 나와 강동으로 돌아갈 때 [[유표]]의 명령을 받고 [[채모]]와 함께 손견을 막아 공격한다.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던 [[유비]]가 장무(張武)와 진손(陳孫)을 토벌하고 취한 [[말 (동물)|말]] [[적로]]를 유표에게 바친다. 괴월은 주인을 해칠 말이라면서 유표에게 타지 말라고 한다. 유비가 훗날 화가 될 것이라 여긴 채모는 유비 암살을 준비하고 유표의 명령이라 속여 괴월을 동참시킨다. 괴월은 [[문빙]]과 [[왕위]]로 하여금 다른 자리를 마련해 [[조운 (촉한)|조운]]을 유비로부터 떼어놓으라 제안한다. 유비는 [[이적 (촉한)|이적]]의 귀띔으로 무사히 빠져나와 적로를 타고 단계(檀溪)를 뛰어넘는다.<ref>채모와 괴월의 유비 암살 미수 일화는 〈선주전〉에 인용된 《세어》(世語)에서 비롯된 일화이다.</ref>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부손, [[왕찬]]과 함께 유종에게 권하고, 이후 강릉태수와 번성후(樊城侯)를 받는다.
* 월왕 [[구천]]
 
* 오왕 [[합려]]
== 가계 ==
* 오왕 [[부차]]
[[파일:괴철.png]]
 
== 각주 ==
<references/>
 
== 참고 문헌 ==
<!--군사가-->
*《부자》(傅子)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에서 인용
*《[[후한서]]》74권下 열전 제64下 유표
 
{{삼국지 주요 등장인물}}
 
[[분류:몰년2세기 미상태어남]]
[[분류:기원전214년 517년 태어남죽음]]
[[분류:월나라유표와 사람주변 인물]]
[[분류:허난성조조 출신휘하의 정치인]]
[[분류:초나라병사한 사람]]
[[분류:춘추 시대의 정치인]]
[[분류:군사학자]]
[[분류:중국의 경제학자]]
[[분류:춘추오패]]
[[분류:김용의 소설 등장인물]]
[[분류:기원전 6세기 중국 사람]]
[[분류:기원전 5세기 중국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