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sadal (토론 | 기여)
Asadal (토론 | 기여)
잔글편집 요약 없음
8번째 줄:
== 국호 ==
{{한국사}}
 
=== [[대한제국]]의 계승 ===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대한제국 고종|고종 황제]]가 창안한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4월 10일 임시 정부의 첫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국호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할 때 [[신석우 (1895년)|신석우]] 선생이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하니, [[여운형]] 선생이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또 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그러자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부연 설명을 하며 대한제국에서 황제의 나라를 뜻하는 '제국'(帝國)을 공화국을 뜻하는 '민국'(民國)으로 바꾸어 대한민국을 국호로 제안하였고, 다수가 공감함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ref>송승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385157 《우리가 몰랐던 우리 역사: 나라 이름의 비밀을 찾아가는 역사 여행》], 학민사, 2013년 12월 10일.</ref>
줄 19 ⟶ 18:
== 정부 수립 과정 ==
=== 정부 수립의 준비 ===
[[파일:Entrance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ROK in Shanghai.JPG|썸네일|200픽셀|상하이시의왼쪽|[[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자취]]
 
[[3·1 운동]] 직후 국민의 의사를 대표할 의결기관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순종|순종]]이 건재하고 있어서 망설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결집되어 있었다.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 이들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했다. 먼저 임시 정부 수립론이 대두되었는데, [[조선총독부]]에 맞서 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러나 [[여운형]] 등은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고 당 조직을 제대로 갖추고 난 뒤에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것은 먼저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에 묻혔다.<ref>같은 책, 23~24쪽</ref>
 
줄 24 ⟶ 25: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1919년]] 여름부터 더욱 민활하게 움직였다. [[신규식 (1880년)|신규식]]을 비롯하여 [[서병호 (1885년)|서병호]], [[여운형]], [[조동호]], [[박찬익 (1884년)|박찬익]], [[선우혁]] 등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 고려교민 친목회를 조직하여 교민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망을 만들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성환 (1875년)|조성환]], [[조소앙]] 등 명망 높은 독립지사가 상하이로 와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현순]], [[손정도]] 등이 이곳으로 파견되었다.<ref>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ref>
 
[[파일:Entrance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ROK in Shanghai.JPG|썸네일|200픽셀|상하이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자취]]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을 것을 결의하고 [[김규식]] 등을 대표단으로 파견하였다. 프랑스에 도착한 [[김규식]]은 [[신한청년당]]과 [[전파]][[통신]]으로 교신하였고, [[신한청년당]]은 로비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송금해 주었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ref name="ReferenceA">《한국독립운동사사전,3-7 :운동·단체편(4),p 337~ p 339》,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ref>
줄 35 ⟶ 34:
 
=== 정부 수립 주체 ===
[[파일:Prince Imperial Ui김규식.jpgJPG|썸네일|200픽셀150픽셀|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망명을 시도한 대한제국왼쪽|[[김규식]] [[의친왕신한청년당]] 이강당수]]
[[파일:Prince Imperial Ui.jpg|썸네일|200픽셀|오른쪽|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망명을 시도한 대한제국 [[의친왕]] 이강]]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는 [[신한청년당]] 대표인 [[김규식]]<ref>[[김규식]]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모태인 [[신한청년당]]의 대표이자, 1919년 3~4월 각지에서 상하이, 노령, 조선민국, 한성정부 등의 임시 정부 수립의 시발점이 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 중이었다.</ref>과 신한청년당원인 [[여운형]], [[손정도]], [[조소앙]], [[김철 (1886년)|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1895년)|신석우]], 그리고 [[현순]], [[신익희]], [[조성환 (1875년)|조성환]], [[이광 (1879년)|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시영 (1868년)|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임시 정부)|이영근]], [[조동진]], [[김동삼]] 등 30인이었다. 그 밖에 [[김구]], [[이동녕]], [[신규식 (1881년)|신규식]] 등이 설립에 참여하였고,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등이 1919년 4월에서 9월 사이에 임정의 영수로 임명되어 [[상하이]]로 출입하였다.
108번째 줄:
 
=== 국제사회를 향한 외교적 노력 ===
[[파일:김규식.JPG|섬네일|오른쪽|140픽셀|김규식]]
 
[[1919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이승만]]은 [[미국]]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김규식 (1881년)|김규식]]은 [[프랑스]] 파리에서 전승국의 추인하 독립을 추진하였다. 임시 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중국과 폴란드로부터 승인을 얻어내었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영국]]은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인정하였지만, 그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도 임시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2페이지</ref> 단, 미국 정부에서는 승인하지 않았지만 미국 의회에서는 임정을 승인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832765 43년 美의회에서 상해임정 승인결정]</ref> 한편 1944년 임정은 [[소련]]으로부터의 승인을 받았다.<ref>[http://folkency.nfm.go.kr/sesi/dic_index.jsp?P_MENU=04&DIC_ID=1034&ref=T2&S_idx=67&P_INDEX=2&cur_page=1 한국민속대백과사전,국립민속박물관]</ref> 다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