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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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는 [[신한청년당]] 대표인 [[김규식]]<ref>[[김규식]]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모태인 [[신한청년당]]의 대표이자, 1919년 3~4월 각지에서 상하이, 노령, 조선민국, 한성정부 등의 임시 정부 수립의 시발점이 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 중이었다.</ref>과 신한청년당원인 [[여운형]], [[손정도]], [[조소앙]], [[김철 (1886년)|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1895년)|신석우]], 그리고 [[현순]], [[신익희]], [[조성환 (1875년)|조성환]], [[이광 (1879년)|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시영 (1868년)|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임시 정부)|이영근]], [[조동진]], [[김동삼]] 등 30인이었다. 그 밖에 [[김구]], [[이동녕]], [[신규식 (1881년)|신규식]] 등이 설립에 참여하였고,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등이 1919년 4월에서 9월 사이에 임정의 영수로 임명되어 [[상하이]]로 출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는 구 [[대한제국]] 인사들도 참여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황해도 관찰사와 충청남도 관찰사를 지낸 [[김가진]](金嘉鎭)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男爵) 작위를 받은 고위직 관료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이후 [[대동단]]이라는 비밀 독립 조직을 결성하고 총재를 맡았다. 그는 1919년 10월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고문 겸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았다. 그는

김가진은 [[대한제국]] [[대한제국 고종|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이자 한 때 황태자 후보로 거론되었던 [[의친왕|의친왕 이강]]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우고 실무 준비를 하였다. 의친왕 이강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밀서를 보내, 참여 의사를 표시하였다. 의친왕은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낸참여 밀서에서의사를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 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표시하였다."라고 썼다.<ref>1919년 11월 20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실린 '의친왕의 친서'</ref> 의친왕 이강은 1919년 11월 대한민국중국 상하이에 있는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 차림으로 변복하고 만주 안동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체포된 후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의친왕이 임시 정부에 보낸 밀서 내용은 1919년 11월 20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실렸다.
{{인용문|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 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 1919년 11월, 대한제국 [[의친왕|의친왕 이강]]}}
 
=== 정부 수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