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분류:큰_토막글_문서 참고하여 토막글 틀 정리 (10,000바이트 이상)
편집 요약 없음
8번째 줄:
 
=== 초기생애 ===
오기는 본래 [[위 (춘추 전국)|위나라]](衛) 사람으로, 본래 젊은 시절에는 천금(千金)에 달하는 가산을 저축해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는 돈으로 관직을 얻으려 하였으나 가산만 탕진한채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오기를 비웃자, 오기는 자신을 비방한 30여 명의 사람을 죽이고는 도성의도성 동문동쪽의 곽문(門)으로 빠져나가 달아났다. 이때 오기는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팔을 깨물어깨물며 맹세하기를, "저 오기는 경상(卿相)이 되기 전까지 위나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 말하였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고향을 등지고 달아난 오기는 대학자였던 [[증자 (사상가)|증자]]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오기는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를 지내지 않았고, 그 일로 인하여 증자의 눈밖에 나서 그와의 관계 또한 끝나고 말았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 노나라에서 ===
증자와의 관계가 끊어진 후, 오기는 [[노 (춘추 전국)|노나라]](魯)로 와서 병법(兵法)을 공부하고는 [[노 목공]]을 섬기게 되었다. 이때에 [[제 (춘추 전국)|제나라]](齊)가 노나라를 공격하였는데,공격해오자 노나라에서는노 목공은 오기를 장군으로 삼고자삼아서 하였으나제나라와 싸우려 하였다. 마침그러나 그의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사람이었기에 그를노 목공은 오기를 의심하여 섣불리 기용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오기는 제나라를 돕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이에그렇게 노나라에서하여 마침내노나라의 오기를 장군으로장군이 삼았는데, 오기는 제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그러나 노나라의 어떤 사람이 노나라 군주에게 오기의오기가 마을 사람들을 살해하고 어머니의 장례식에 불참했던 일 등의 과거행적을 폭로하며 그의 심성이 잔인하다고 비방하였으며, 또한 위나라의 죄인인 오기를 등용하는등용한다면 것은노나라와는 동맹국인같은 노나라와핏줄의 위나라의조상을 둔 형제국인 위나라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노나라 군주는 오기를오기에게 의심을 의심하고는품더니 그를 쫓아내 버렸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 위나라에서 ===
 
==== 위 문후 시대 ====
노나라 군주에게 버림받은 오기는 당시 [[위 (전국)|위나라]](魏)의 군주였던 [[위 문후]]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섬기고자 하였다. 위 문후가 신하인 이극(李克)에게 오기가 어떤 사람인지 묻자, 이극은 오기에 대하여 "비록 욕심이탐욕이 많고있고 여색을 밝히지만 용병에 있어서는 [[사마양저]]도 따라잡을 수 없다없습니다."라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위 문후는 오기를 등용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위나라의 장군이 된 오기는 [[진 (영성)|진나라]](秦)를 공격하여 5개 성을 빼앗았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이후 오기가 유생(儒生)의 차림새를복장을 갖추고하고 병법을 논하고자 위 문후를 배알하였는데, 위 문후는 일부러 오기의 앞에서 "과인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소."라 말하며 속내를 감추었다. 그러나 오기는 이미 위 문후가 몰래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그 앞에서 병법을 논하였다. 그의 언변에 감탄한 위 문후는 친히 자리를 마련하여 부인으로 하여금 오기에게 술을 따르게 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베풀었다.<ref>《오자병법》 1편 도국</ref>
 
위 문후는 오기가 용병에 능하고 청렴하며 공정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는 그를 서하(西河)의 태수로 삼았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 ; 《오자병볍》 1편 도국</ref> 이후 오기는 제후국들과 76회에 달하는 싸움을 치러서 64회의 대승을 거두고 나머지도 모두 무승부로 끝을 냈다. 오기의 공로로 인하여 위나라는 사방으로 1천 리에 달하는 영토를 얻었다.<ref>《오자병법》 1편 도국</ref>
 
==== 위 무후 시대 ====
[[기원전 396년]], 위 문후가 죽고 그 아들인 [[위 무후]]가 즉위하였다. 어느날은 무후가 서하에서 배를 타고 노닐다가 그 견고한 산의 형세를 살펴보고는 "나라의 보배"라며 감탄하였다. 그러자 마침 무후의 곁에 있던 오기는오기가 예로부터 많은 군주들이 견고한 지형 만을 믿다가 패망하였으니패망하였다고 주장하며, "나라의 운명은 지형이 아닌보배는 군주의 덕에 달린있을 것이라고뿐, 말하며험한 지형에 무후에게달린 것이 아닙니다."라는 간언을 올렸다올려 위 무후를 납득시켰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 ; 《전국책》 권22 위책1 〈위무후여제대부어서하〉</ref>
 
이후 위나라에서 전문(田文)을 재상으로 삼았는데,<ref>전문(田文)은 제나라의 [[맹상군]]과는 동명이인이다.</ref> 당시 서하태수로 대단한 명성을 날리던 오기는 자신이 재상이 되지 못한 일을 언짢게 여겼다. 오기는 전문을 찾아가 자신이 전문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전문은 자신의 공로와 능력이 비록 오기 만큼은 못하지만, 왕의 나이가 어려서 대신과 백성들이 나라를 받들지 않는 이 때에는 오기보다 자신이 재상이 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반박하여 그를 납득시켰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전문이 죽은 후에 위나라의 재상이 된 공숙(公叔)은 오기의 공로를 시기하였다. 그래서 공숙은 부하들의 의견에 따라, 일부러 위 무후를 찾아가서 오기가 위나라보다 더 강한 진나라에 붙을까 걱정이니, 그에게 위나라의 공주와 혼인하도록혼인할 하여서것을 권유하여 속마음을 떠볼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는만일 오기가 이 제안을 납득한다면 그가 위나라에 남을 것이나, 그렇지 않는다면 진나라로 떠날 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집으로 달아와돌아온 공속은 오기를 초대하고는초대해놓고는 일부러 위나라 공주를 박대하여 자신을 함부로 대하게 하였다. 그 광경을 본 오기는 위나라 공주가 재상을 박대한다고 생각하여 그녀를 멀리하게 되었고, 위 무후가 공주와 혼인할 것을 제안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위 무후는 오기를 의심하여 더 이상 신임하지 않게 되었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 초나라에서 ===
39번째 줄:
 
=== 죽음 ===
[[기원전 381년]], 오기를 재상으로 등용했던 초 도왕이 죽었다. 그러자 이전에 오기의 개혁정책으로 특권을 잃은 초나라 종실의 귀족과 대신들이 난을 일으켜 오기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오기는 달아나서 초 도왕의 시신 위에 엎어졌는데, 이때 오기를 공격하던 무리들이 오기에게 칼을 휘두르고 화살을 날려 죽였으나 그 와중에죽이다가 초 도왕의 시신까지 활로 맞추고 말았다. 도왕의 장례를 치르고 즉위한 [[초 숙왕]]은 왕의 시신을 화살로 쏜 자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으니, 이 사건에 연루되어 멸족당한 집안이 70여 곳이나 되었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