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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오기는 남쪽으로는 [[백월]](百越)을 평정하였고, 북쪽으로는 [[진 (규성)|진]](陳) · [[채 (춘추)|채]](蔡)를 병합하여 [[조 (전국)|조나라]](趙) · [[한 (전국)|한나라]](韓) · [[위 (전국)|위나라]](魏) 등의 삼진(三晉)을 격퇴했으며, 서쪽으로는 [[진 (영성)|진나라]](秦)를 정벌하여 제후들의 두려움을 샀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 죽음죽음과 사후 ===
[[기원전 381년]], 오기를 재상으로 등용했던 초 도왕이 죽었다. 그러자 이전에 오기의 개혁정책으로 특권을 잃은 초나라 종실의 귀족과 대신들이 난을 일으켜 오기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오기는 달아나서 초 도왕의 시신 위에 엎어졌는데, 이때 오기를 공격하던 무리들이 오기에게 칼을 휘두르고 화살을 날려 죽이다가 초 도왕의 시신까지 활로 맞추고 말았다. 도왕의 장례를 치르고 즉위한 [[초 숙왕]]은 왕의 시신을 화살로 쏜 자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으니, 이 사건에 연루되어 멸족당한 집안이 70여 곳이나 되었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이후 [[위 혜왕]] 시기에 이르러 [[위 (전국)|위나라]]의 공숙좌(公叔痤)가 장군이 되어 회북(澮北)에서 [[한 (전국)|한나라]] · [[조 (전국)|조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장수인 악조(樂祚)를 사로잡은 일이 있었다. 위 혜왕이 공숙좌에게 100만 록(祿)에 달하는 토지를 상으로 내리려하자, 공숙좌는 이를 사양하며 자신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오기의 가르침을 들었다. 이에 위 혜왕은 오기의 후손을 찾아내서 20만의 전록(田祿)을 하사하였다.<ref>《전국책》 권22 위책1 〈위공숙좌위위장〉</ref>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