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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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대한민국 제4공화국|박정희 정권]]은 [[1978년]], 제9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5월 18일]]에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대의원 정수는 2,583명이 되었다. 유권자 19,140,303명 중 13,319,076명이 투표해 78.9%의 투표율을 보였다.<ref>http://www.ddc.go.kr/ddc/menu_01/30/3%EA%B6%8C.pdf</ref><ref>http://elecinfo.nec.go.kr/neweps/ezpdfwebviewer/ezpdf/customLayout.jsp?contentId=2F6570646174612F455030362F4D4F4E323030362F30312F4D4F4E303132303036303033312F4D4F4E303132303036303033315F30303031532E706466#</ref>
 
{| class="wikitable"
|+선거인 정수<ref>http://elecinfo.nec.go.kr/neweps/ezpdfwebviewer/ezpdf/customLayout.jsp?contentId=2F6570646174612F455030362F4D4F4E323030362F30312F4D4F4E303132303036303033312F4D4F4E303132303036303033315F30303031532E706466#</ref>
!
!정수
!유권자
!투표자
!투표율
!유효투표
|-
|서울
|391
|4,405,393
|2,754,086
|67.8
|2,665,140
|-
|부산
|145
|1,531,309
|942,148
|77.1
|919,727
|-
|경기
|319
|2,304,247
|1,634,742
|78.2
|1,593,630
|-
|강원
|151
|919,125
|764,857
|86.9
|746,432
|-
|충북
|131
|772,655
|577,877
|87.0
|562,148
|-
|충남
|235
|1,524,427
|1,068,658
|83.4
|1,038,174
|-
|전북
|203
|1,215,551
|905,394
|84.9
|876,166
|-
|전남
|312
|1,973,051
|1,402,831
|81.5
|1,356,531
|-
|경북
|379
|2,547,239
|1,833,990
|84.4
|1,790,763
|-
|경남
|290
|1,731,970
|1,255,860
|83.0
|1,223,490
|-
|제주
|27
|215,336
|178,633
|86.9
|173,977
|-
|계
|2,583
|16,877,189
|13,319,076
|78.9
|12,946,178
|}
 
==선거 결과==
[[1978년]] [[7월 6일]] 제9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대의원 정수는 2,583명이나,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사퇴하여 대통령 선거 당시 재적 대의원 수는 2,581명, 당선에 필요한 표수는 1,291표였다. 단일후보인 [[박정희]]가 2,581명의 대의원 중에 2,578명이 출석한 가운데 2,577표를 얻은(무효 1표) 박정희가 당선되어, [[1978년]] [[12월 27일]]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7월 5일 곽상훈 등 507명의 대의원의 추천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단독으로 입후보됐다.<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070500209201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7-05&officeId=00020&pageNo=1&printNo=17461&publishType=00020|제목=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확인날짜=2019-04-07}}</ref>
 
단일후보인 [[박정희]]가 2,581명의 대의원 중에 2,578명이 출석한 가운데 2,577표를 얻은(무효 1표) 박정희가 당선되어, [[1978년]] [[12월 27일]]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는 취임일인 12월 27일을 임시공휴일로 하고 통행금지를 하루 해제하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함과 아울러 130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 조치를 취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3, 인물과사상, 2002, 178-180</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