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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위종'''(李瑋鍾, [[1884년]] ~ [[1924년]]?)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러시아 제국|러시아]]로 귀화한 후에는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llang|ru|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조선|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조선 세종|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후손(광평대군파)이며 [[러시아 제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였던 [[이범진 (1852년)|이범진]]의 아들이고 무위대장을 지낸 [[조선]] 말기의 군인인 [[이경하 (조선)|이경하]]의 손자이다. 경술국치후 아버지 [[이범진 (1852년)|이범진]]이 자살하자 장교의 길을 선택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1917년]]에 전사했다고 알려졌으나, [[2000년대]]에 발견된 이위종 본인의 자서전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적어도 [[1924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자서전을 통해 본래 [[1887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이위종의 실제 출생년도가 [[1884년]]인 것도 함께 밝혀졌다.
==이위종과 관련해서 神의 존재를 증명할수 없는 이유==
 
헤이그 특사 사건 당시 이위종은 국권회복을 기도하여 애국을 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무병장수하거나 말년에 일확천금의 행운을 누리는 등 호의호식하지 못하였다.
그가 말년에 무병장수 및 호의호식하지 못하여 神의 존재는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국권회복을 기도하여 애국자이던 이위종은 말년에 무병장수 및 호의호식을 하여야 神의 존재가 확실히 증명되던 것인데 그렇지 않아 神의 존재는 증명되지 않았다.
== 생애 ==
1902년 대한제국 관료 등용된 그는 훗날 [[1907년]] [[조선 고종|고종]]의 밀령을 받고 [[이준 (1859년)|이준]]·[[이상설]]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동행하였다. 이위종은 전 주프랑스공사관 서기생, 전 주독일공사관 참서관(1904.02.07~1904.3.17), 전 주러시아공사관 3등참서관(1903.9.01~1904.5.18 공적인 공사관 철폐)이었으며,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ref>유석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19/2010111901163.html 103년 전 만국평화회의 닫힌 문 앞 울분 토하던 한국… 그 현장 잊어도 되나], 조선일보</ref> 그러나 [[일본]] 대표의 방해로 회의 참석을 거부당하였으나, 기자협회의 도움으로 한국의 억울한 입장과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일본은 이들 3의사에 대한 궐석 재판을 열고 사형을 선고하여 체포령을 내렸다. 이위종은 이미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에 묻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그 후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계속 항일 투쟁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