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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延秉昊, [[1894년]] [[11월 22일]] [[증평군|증평]] ~ [[1963년]] [[1월 26일]])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ref>[http://encykorea.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호 도명(圖明). 일명 병학(秉學), 동학(東學), 병호(炳昊).
 
청안중명학교와 북간도 창동학원, [[중화민국]]에 건너가 적을 두며 [[베이징]]에서 광복군의 소개로 [[리다자오]]와 한때 만남을 갖기도 했으며 때로는 심하게 다투면서 [[러시아]]를 통한 [[대한민국]]의 독립 지원금을 최대한 유치하기 위해 분투하였다. 일본 제국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이 강탈 당하자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난징]]·[[상하이]] 등지로도 전전하며 활동하였다.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적이 있으며 [[지린]] 군정서 분서조직, 서기장 참모를 역임하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였고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기로 하고 동지 [[송세호]](宋世浩)와 함께 입국하여 [[이병철]](李秉澈)·[[조용주]](趙鏞周) 등을 포섭, 비밀항일운동단체인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설립목적은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여 임시정부에 제공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정부에 송금하는 것을 주요골자로 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여성들의 비밀결사인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와 긴밀한 협조를 취하며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1920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다. [[1922년]] 출옥하자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여운형]] 등과 같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동아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한국혁명당 중앙집행위원 겸 선전부장, 경성대한민국임시정부환영회 영접부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한국독립당 선열사적조사위원장 겸 훈련부장, 대한민국정무위원 겸 농민부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