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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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의 반응 ==
[[파일:신탁통치 오보사건.gif|섬네일|400px|오른쪽|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파일:1945-12-27 보도의 진상.jpg|썸네일섬네일|400px|left왼쪽|1945-12-27 보도의 진상. 같은 날 조선일보, 서울 신문도 동아일보와 같은 내용의 보도를 했으며, 이는 UP, AP 등 미국 통신사의 기사를 합동통신을 통해 받아 전재한 것이다.<ref name="up"/>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1954년 워싱턴 포스트에 합병됨)는 1945년 12월 26일자 7면에 UP 기사를 전재한 ‘May Grant Korea Freedom’이라는 기사를 통해 “미국의 번스 국무장관이 소련의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라는 훈령을 받고 러시아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ref name="dong1">[http://news.donga.com/Series/70070000000600/3/all/20041212/8138197/1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 삼상회의 보도] 동아일보 2004-12-12</ref><ref name="dong2">[http://news.donga.com/3/all/20051229/8261289/1 <모스크바 3상회의 60주년> 좌익 '찬탁돌변' 남북분단 불러] 동아일보 2005-12-29</ref> 좌익들도 처음엔 신탁통치에 강력히 반대했으므로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했다는 보도가 반탁운동을 촉발했다는 주장도 말이 되지 않고, 실제로는 미군정은 신탁통치안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소련은 이를 강하게 추진하려고 했으므로 이 내용 자체가 오보라고 보기도 어렵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는 곧바로 한반도에 전해졌으나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3상회의의 최종결정안이 발표되기 전에 UP와 AP 통신이 1945년 12월 25일자로 "번즈 국무장관이 러시아의 신탁통치안에 반대되는 즉시 독립안을 주장하라는 훈령을 받고 러시아로 갔다 (Secretary of State Byrnes went to Russia reportedly with instructions to urge immediate independence as opposed to the Russian thesis of trusteeship.)"는 내용의 기사를 타전하고<ref name="up">[https://www.upi.com/Archives/1945/12/25/Independence-of-Korea-is-being-urged/9081517275283/ Independence of Korea is being urged] United Press, December 25, 1945</ref>, ≪동아일보≫등 국내 언론들이 이를 받아 12월 27일자로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라는 내용의 기사를 냈는데 이는 나중에 1946년 1월 24일 소련이 타스통신을 통하여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경과와 탁치안의 원래 제안자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오보임이 밝혀졌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합의되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1945년 12월 28일께부터 처음에는 좌우파 가릴 것없이 모두 강력한 반탁의사를 표명했다. 12월 30일 결성된 임시정부가 주도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공산당 당수 [[박헌영]]도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dh_001_1945_12_30_010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선임 : 1945년 12월 30일] 서울신문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印은 常任委員)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등 포함</ref>, 이튿날인 31일 상무위원(常務委員)에 선정되었다.<ref>[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31_015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파업단행과 상무위원 선정] 동아일보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金若水..<br>[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5282759 南北朝鮮, 左右一致, 行動方針을 討議 決定, 反託總動員中央委員會] 중앙신문 1946.01.01 상임위원 : 21명중 洪命憙, 朴憲永 있음.</ref> 12월 29일의 경교장 모임에 참석했던 강원룡 목사의 증언도 있으므로 박헌영의 참여는 사실로 보이며<ref>[http://news.donga.com/Series/70070000000600/3/all/20041212/8138197/1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 삼상회의 보도] 동아일보 2004-12-12</ref>, 그 외에도 다수의 좌파 인사가 참여하였다.
 
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1946년 1월 1일에 만났을 때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3일 다시 만났을 때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ref name="cg0125">[http://archive.history.go.kr/id/AUS179_01_05C0081_009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25 Jan. 1946<br>[[:File:1946-01-25-좌익의 반탁에서 찬탁 돌변.jpg]]</ref>. 1월 2일 공산당중앙위원회가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사항을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했는데, 책임비서 박헌영이 주도했을 것이므로 신탁통치에 대한 박헌영의 입장은 1월 2일에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ref name="chan0102">[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2_011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br>[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5282803 反託보다 먼저 戰線 統一,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態度 表明.] 중앙신문, 1946.01.03</ref><ref name="da0105">[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6010500209201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6-01-05&officeId=00020&pageNo=1&printNo=6855&publishType=00020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ref>
 
지난 연말까지도 반탁을 강력히 표명하던 여러 좌파단체들도 1월 2일을 기점으로 찬탁으로 일제히 바뀌었는데<ref>[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2_008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ref>, 미군정도 이러한 일에는 소련의 의사가 작용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ref name="cg0125"/>. 1월 3일에 예고되었던 좌익들의 반탁집회는 집회 당일날 지도부에 의해 찬탁집회로 돌변하여 진행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ref>[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003 “신탁통치는 오보·왜곡 보도” 외치는 전교조] 미래한국 2016.01.06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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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45년 회의]]
[[분류:미국-영국 관계]]
[[분류:소련-영국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