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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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1919년]] 여름부터 더욱 민활하게 움직였다. [[신규식 (1880년)|신규식]]을 비롯하여 [[서병호 (1885년)|서병호]], [[여운형]], [[조동호]], [[박찬익 (1884년)|박찬익]], [[선우혁]] 등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 고려교민 친목회를 조직하여 교민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망을 만들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성환 (1875년)|조성환]], [[조소앙]] 등 명망 높은 독립지사가 상하이로 와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현순]], [[손정도]] 등이 이곳으로 파견되었다.<ref>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ref>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을 것을 결의하고 [[김규식]] 등을 대표단으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어릴 때부터 [[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영어, 라틴어, 신학, 수학, 과학 등 서구식 교육을 받았고, [[서재필]]이 만든 [[독립신문]] 기자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여 [[로노크 대학교]] 학사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를 받은 인재였다. 특히 그는 어학에 능통하여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고,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아직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거절당하자,거절당했다. 김규식은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받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ref name="ReferenceA">《한국독립운동사사전,3-7 :운동·단체편(4),p 337~ p 339》,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ref>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