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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키아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에서 900년경까지 [[지중해]]를 가로질러 퍼져나간 진취적인 [[제해권|해상 무역 문화]]를 가졌다고 과거의 고대사엔 수록되어 있지만. 최근의 고고학 발굴로 페니키아 문명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기원전 40세기에 '기시 문명'이 지중해 문명과 [[메소포타미아]]를 연계하는 문명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이 '기시 문명(Gish)'이 아프리카의 '쿠마 문화(Kuma), [[나일 강]] 유역의 쿠시 문화(Kush)와 연결고리가 있으며 그 관계를 연구중이라 한다. 연구된 바에 의하면 [[북아프리카]]의 튀니지(고대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알제리,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권역의 국가와 무역으로 [[이탈리아]]의 중, 남부 도시에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리베리아(현 [[스페인]])의 항구도시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는 것은 이집트 기록에 의한 것이다. 고대의 경계가 변동하긴 했지만, 도시의 문화 중심은 최남단으로 도시 [[티레]]로 여겨진다. 페니키아 본토의 도시 가운데 [[시돈]]과 티레 사이에 있는 [[사렙타]]는 가장 완벽하게 발굴된 도시이다. 페니키아는 최초로 [[갤리|갤리선]]을 사용한 문명으로 이들은 갤리선을 이용한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페니키아 문명이 단일한 민족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와 같이 [[도시 국가]]를 이루었으며, 각각의 도시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독립돼 있었다. 페니키아의 도시 국가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협력하기도 하였으나 도시간에 갈등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레반트]] 지역의 [[티레]]와 [[시돈]]은 페니키아의 가장 강력한 도시였다.
[[기원전 1000년]]경, 페니키아인들은 [[레바논]], [[키프로스]], [[시리아]], [[이스라엘]] 및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에 많은 묘비를 남겼다. [[페니키아어]]는 [[카르타고]]어의 모태가 되었으며 카르타고-페니키아어는 기원후 [[5세기]]까지 사용되었다.
 
[[파일:Sarcophag of Ahiram inscription.png|center가운데|750px|섬네일|기원전 1200년경 비블로스에서 제작된 아히람의 석관에 쓰여진 페니키아 문자<ref>Kuhrt, Amélie (1995). The Ancient Near East: c.3000-330 B.C.. London: Routledge, 404. {{ISBN|0-415-16762-0}}</ref><br /> {{인용문|아히람의 아들이자 비블로스의 왕인 이토바알의 관, 그가 "영원의 집"에 거하도록 그의 아버지 아히람을 위해 만들다. 언젠가 왕들의 왕이요 통치자들의 통치자이며 군대의 사령관인 그가 관을 열고 비블로스에 돌아온다면, 그는 지배의 홀을 뺏기고 그의 왕좌는 전복되며 비블로스는 평화를 잃으리라! 그가 이 비문을 깬다면, 그것은...!}}]]
 
== 페니키아의 영향 ==
 
[[분류:페니키아| ]]
[[분류:기원전 제2천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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