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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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설'''(韓圭卨, [[1856년]]<ref>한규설의 생년은 1848년설도 있으나 여기서는 청주한씨의 족보를 바탕으로 한『참정대신 강석 한규설 선생 전기』(黃沍根 저, 한국자료문화자료연구소, 1991)에 의한다.</ref><ref>{{웹 인용 |url=https://people.aks.ac.kr/front/tabCon/gov/govView.aks?govId=GOV_JAK_6JOc_MN_0SS_02DEEN_004811&curSetPos=2&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제목=『承旨先生案』(奎9731) |확인날짜=2014-09-2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21005724/https://people.aks.ac.kr/front/tabCon/gov/govView.aks?govId=GOV_JAK_6JOc_MN_0SS_02DEEN_004811&curSetPos=2&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보존날짜=2016-03-21 |깨진링크=예 }}</ref> [[2월 29일]] ~ [[1930년]] [[9월 22일]])은 [[구한말]] 시대의 무관 겸 정치가이다. [[호 (이름)|호]]는 강석(江石), [[자 (이름)|자]]는 순우(舜佑)이며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다.
 
[[1880년]]에 [[음서]]로 문관 하급 [[관료]] 직에 천거되어 [[1884년]]에 무과 급제한 이후 사복시 장위사 시절 동료 [[사복시]] 주부 [[이기동 (1856년)|이기동]], [[홍문관]] 부수찬 [[이도재]], [[성균관]] 예하 강독관 [[어윤적신태유]], [[신태유어윤적]] 등과 함께 [[갑신정변]] 진압 관련 작전에 간접성 참전키도 한 그는 [[갑신정변]] 당시 [[갑신정변|정변]] 진압군 핵심형 중심 간부로 참전한 친형 [[한규직]]이 전사하는 사태를 목도하였고 그 훗날 의정부 찬성 등을 거쳐 [[1905년]]에 [[의정부]] 참정을 역임하였다. 그 해 일본의 전권 대사인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여러 대신들에게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어 한일병탄 때에는 일본 정부에 의해서 남작이라는 작위가 내려졌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일본인]]들이 차라리 그를 구슬리어 보려고 했지만 결국 헛일이 되었다.
 
친구 [[이봉의]]가 병석에 누워있고 그 아들이 와서 [[한일병탄]] 때 주는 관작을 받아야 되느냐고 물었을 때, 나라에서 주는 것이니 차라리 그냥 받으라 하고, 자신은 작위를 사퇴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이봉의]] 집안과 절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