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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11월에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고 현비 동악씨가 천연두에 걸리자 순치제가 총애하던 현엽을 동악씨의 양자로 주려 했으나, 효장태후와 생모인 동가씨가 황위 계승자인 현엽이 천연두에 옮을 것을 염려하였기에 이에 완강히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현엽이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며 다행히 얼마 안 되어 나았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660년]](순치 17년) 12월, 동악씨는 결국 차도가 보이지 않고 죽자 순치제는 즉시 동악씨를 효헌단경황후(孝獻端敬皇后)로 추서하고 [[태묘]]에 그 신주를 모셨다. 그리하고 나서, 순치제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총애하던 태감을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보내어 동악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동악씨는 출신이 높은 귀족 집안이 아닌데 황후에 봉해지고, 서출 출신의 죽은 황자가 이례적으로 황태자의 작위를 받자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반대가 매우 컸다. 반대가 심하고 황태자였던 자신의 4남을 잃은 슬픔까지 겹쳐 순치제는 [[1661년]](순치 18년) 1월 하순, 제위에서 물러나 이미 자신의 태감이 있는 오대산 청량사로 출가하고, 주지 옥림수(玉林秀)에게서 행치(行痴)라는 법명을 받았다.<ref group="주">흔히 순치제가 이 때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하나, 그때엔 이미 천연두가 진정되었고 조정에서 급작스럽게 붕어 사실을 발표하여 순치제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만만치 않았다. 이로 인해 불심이 깊어던 순치제가 스스로 황위를 버리고 출가하였다는 설이 있다.</ref><ref name="big5">{{웹 인용| url = http://big5.xinhuanet.com/gate/big5/news.xinhuanet.com/st/2006-06/20/content_4720657.htm| 제목 = 청나라 궁정의 비사: 순치제의 출가와 옹정제의 황위 찬탈(揭秘淸宮檔案:順治出家、雍正簒位皆屬戲說 / 解放日報)|확인날짜= 2008-09-23| 저자 = 천수쥔|날짜= 2006-06-20|형식= HTML}}</ref><ref>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p.295, 청아출판사, 2006년 {{ISBN|89978-3688-043793680-6345-2}}</ref>
 
당시 대신들은 순치제에게 빨리 돌아오라 종용하였으나 순치제는 끝내 듣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기까지 하였다.<ref name="big5"/> 〈세조장황제실록〉에 따르면 순치제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고 회궁 도중 천연두에 걸려 [[1661년]](순치 18년) [[2월 5일]] 24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황위가 유고 상태가 되었다. 당시 황태후이자 순치제의 어머니 효장태후는 순치제가 붕어하자 매우 놀라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조정의 최고 신료인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 6인<ref group="주">[[팔기군]] 가운데 정황기, 양황기, 정백기 출신만 뽑았으며 각 기당 2인씩 배출할 수 있는 정1품의 최고 관직이었다.</ref> 과 각지의 친왕·군왕들을 불러들였다.<ref>장유유, 허유영 역, 황제 배후의 여인,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89-958251-9-7}}, 347-348쪽</ref> 그 중 미리 지어진 유조에 따라 조정의 수장인 정황기 출신의 감국대신 겸 이부상서 [[색니]], 양황기 출신의 병부상서 [[오배]], 정백기 출신의 형부상서 [[소극살합]], 역시 양황기 출신의 호부상서 [[알필륭]]에게 일단 황궁을 봉쇄하고 궁인들에게 입단속을 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