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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영토 범위에 관하여는 《[[삼국지]]》<ref>[[진수 (서진)|진수]](3세기),《[[:s:삼국지|삼국지]]》〈[[:s:삼국지/권30|권30 오환선비동이전]]〉 “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부여는 만리장성 이북의)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으로 고구려와 접하고, 동으로 읍루, 서로 선비, 북으로 약수(弱水)에 접한다.)</ref>, 《[[후한서]]》<ref> 범엽(5세기), 《[[후한서]]》 〈[[:s:zh:後漢書/卷85|卷85]]〉“夫余國,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 지방이 이천 리로서 본래 예(濊)의 땅이다.)</ref> 등에 언급되어 있다. 이를 종합하면 부여의 영토는 다음과 같다.
 
(1) 부여는 [[만리장성]]<ref>{{웹 인용 | url =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JO/viewJuJO.jsp?pPageLevel=6&pLevel=5&pType=T&pDatabaseID=jo_004_001&pRecordID=jo_004_001c_02_003 | 제목 =중국정사조선전 주석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nowiki>[註003] 長城之北 去玄菟千里</nowiki> | 출판사 =국사편찬위원회 | 인용문 =本傳의 長城은 현재의 萬里長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燕·秦시대에 쌓은 長城을 의미하는 것으로, 1975년 이후 中共에서 발굴된 당시 長城의 東端은 대체로 遼河 本流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3차 玄菟郡治인 撫順 지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三國志』의 ‘長城之北 去玄菟千里’와『後漢書』의 ‘在玄菟北千里’는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參考文獻≫王國良, 『中國長城沿革攷』1931.佟柱臣, 「赤峰附近新發見之漢前土城址與古長城」『歷史與考古』1946, 瀋陽博物館.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編, 『新中國的考古發現和硏究』1984, 文物出版社. }}{{깨진| 확인날짜 =2013-03-23 링크|url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40111161249/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JO/viewJuJO.jsp?pPageLevel=6&pLevel=5&pType=T&pDatabaseID=jo_004_001&pRecordID=jo_004_001c_02_003 | 보존날짜 =2014-01-11 | 깨진링크 =예 }}</ref> 이북의 [[현도군]] 북쪽 천리에 있었다. 《[[한원]]》에서도 《[[위략]]》을 인용하면서, 만리장성 북쪽으로 1천리에 있다고 하였다.<ref>장초금(張楚金, 660년 이전) 《[[한원]]》 [[:s:zh:翰苑|원문]] “魚豢魏略曰夫餘國在玄菟長城北去玄菟千餘里 南接句驪 東接挹婁即肅愼國者也”(어환의 위략에서 이르되, 부여국은 현도 장성 북쪽, 즉 현도에서 1천여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읍루, 즉 숙신국과 접한다. )</ref> 《[[삼국지]]》의 기사도 이 《[[위략]]》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ref>전해종(全海宗), 《동이전의 문헌학적 연구》(東夷傳의 文獻學的硏究) 1980.</ref> <ref>{{웹 인용 | url =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JO/viewJuJO.jsp?pPageLevel=6&pLevel=5&pType=T&pDatabaseID=jo_004_001&pRecordID=jo_004_001c_02_004 | 제목 =중국정사조선전 주석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nowiki>[註004] 夫餘在長城之北 …… 東與挹婁</nowiki> | 출판사 =국사편찬위원회 | 인용문 =『魏略』의 이 佚文 중 ‘即肅愼國者也’를『翰苑』의 註記者인 雍公叡가 첨가한 기사로 보아 반드시『魏略』의 舊文은 아닐 것이라는 說이 있으나, 기사 전체는 『魏略』의 舊文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따라서『三國志』의 ‘長城之北’의 기사도『魏略』의 異本이나 ‘原魏略’에 의거한 기사로 생각된다.(全海宗, 『東夷傳의 文獻學的硏究』) ≪參考文獻≫『翰苑』夫餘條 所引『魏略』全海宗, 『東夷傳의 文獻學的 硏究』1980. }}{{깨진 링크|url=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JO/viewJuJO.jsp?pPageLevel=6&pLevel=5&pType=T&pDatabaseID=jo_004_001&pRecordID=jo_004_001c_02_004 }}</ref>
 
(2) 부여는 동쪽으로 [[읍루]](挹婁)와 접하고 있었다. 《[[진서]]》(晋書)에 의하면 읍루의 후신인 [[숙신]]이 부여에서 60일이면 갈 수 있다<ref>《[[진서]]》(晋書),[[:s:zh:晉書/卷097|四夷傳]], “肅慎氏一名挹婁...去夫餘可六十日行。”</ref>고 하여, 부여 중심부로부터 대략 1,000리의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의 읍루는 부여에 예속되어 있었던 까닭에 실지 부여의 영역은 읍루의 동변(東邊)인 [[연해주]] 일대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ref>{{웹 인용 | url =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JO/viewJuJO.jsp?pPageLevel=6&pLevel=5&pType=T&pDatabaseID=jo_004_001&pRecordID=jo_004_001c_02_006 | 제목 =중국정사조선전 주석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nowiki>[註006] 方可二千里</nowiki> | 출판사 =국사편찬위원회 | 인용문 =② 東境: 夫餘의 동쪽은 挹婁와 접하였다고 하는데, 『晋書』「東夷列傳」에 의하면 挹婁의 후신인 肅愼이 부여에서 60일이면 갈 수 있다고 하여, 夫餘 中心部로부터 대략 1,000리의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의 읍루는 夫餘에 예속되어 있었던 까닭에 실지 夫餘의 영역은 읍루의 東邊인 연해주 일대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參考文獻≫『漢書』卷28下「地理志」8下.『後漢書』卷90「烏桓·鮮卑列傳」, 『晋書』卷97「東夷列傳」肅愼氏條., 『조선전사』2(고대편), 1979, 사회과학원 출판사.,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깨진 링크|url=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JO/viewJuJO.jsp?pPageLevel=6&pLevel=5&pType=T&pDatabaseID=jo_004_001&pRecordID=jo_004_001c_02_006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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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군은 확인되지 않으나, 길림 주변에 독특한 철기 시대의 유적(포자연유형)들이 발굴되어 이로부터 세력의 범위를 추정하고 있다.
=== 부여전(夫餘傳) ===
《[[삼국지]]》 위서의 〈오환선비동이전〉(권30) 중, 부여 관련 기사, 즉, 부여전(夫餘傳)은 총 930자(字)이며, 중국 정사(正史) 중 [[부여]]에 관한 최초의 열전(列傳)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은 부여의 위치와 강역을 비롯하여 관제·의식(衣食)·의례(儀禮)·풍속·산물(産物) 등 부여의 생활습속에 관한 상세한 상태기술과 [[현도군]]·[[후한]](後漢)·공손씨(公孫氏) 등 중국의 제(諸) 세력과의 관계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문헌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사의 1/3 정도가 《위략(魏略)》 기사와 관련된 것인데, 진수가 참고한 《위략(魏略)》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 《위략(魏略)》과는 다른 이본(異本)이나, 원위략(原魏略)에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위략(魏略)》의 부여와 고구려 공통의 습속 기사는 생략된 것이라고 한다.<ref>전해종(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일조각]](一潮閣).pp.39~64</ref> 이러한 점에서 부여전은 종래의 과대한 평가와는 달리 전체적으로는 두찬(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위략(魏略)》이 멸실된 현재 부여전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 《위략(魏略)》 기사와 함께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사서(史書)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ref>{{웹 인용 |url = 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JO/viewJuJO.jsp?pPageLevel=6&pLevel=5&pType=T&pDatabaseID=jo_004_001&pRecordID=jo_004_001c_02_001 |제목 = 중국정사조선전 주석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nowiki>[註001]</nowiki> 夫餘傳 |출판사 = 국사편찬위원회 |인용문 = 『三國志』夫餘傳은 총 930字이며, 中國正史 중 夫餘에 관한 최초의 列傳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은 夫餘의 位置와 강역을 비롯하여 官制·衣食·儀禮·風俗·産物 등 夫餘의 生活習俗에 관한 상세한 상태기술과 玄菟郡·後漢·公孫氏 등 中國의 諸 勢力과의 관계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문헌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사의 1/3 정도가『魏略』기사와 관련된 것인데, 撰者인 陳壽가 참고한『魏略』은 裵松之 注에 인용된『魏略』과는 다른 異本이나, 原魏略에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며,『魏略』의 夫餘와 高句麗 공통의 習俗기사는 생략된 것이라고 한다.(全海宗,『東夷傳의 文獻的 硏究』pp.39~64) 이러한 점에서『三國志』夫餘傳은 종래의 과대한 평가와는 달리 전체적으로는 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魏略』이 逸失된 현재『三國志』夫餘傳은 裵松之 注에 인용된『魏略』기사와 함께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史書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參考文獻≫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出版部.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一潮閣. }}{{깨진|확인날짜 = 2013-03-19 링크|url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1213050444/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JO/viewJuJO.jsp?pPageLevel=6&pLevel=5&pType=T&pDatabaseID=jo_004_001&pRecordID=jo_004_001c_02_001 |보존날짜 = 2013-12-13 |깨진링크 = 예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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