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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박영효의 집은 귀족이나 일본인 관리만 출입하였기 때문에 ‘귀족회관’이라 불렀으며, 바로 옆에 그의 별장이 있었다.{{출처|날짜=2019-04-1211}} 1912년 [[천도교]]에서 이 별장을 매입하여, 천도교회의 3대 기념일 등 각종 행사를 진행하였다.<ref name="보고서542">{{harvnb|이정은 외|2008|p=542}}.</ref> 1919년 1월 20일,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지도부는 상춘원에서 [[손병희]]와 모여<ref>{{뉴스 인용 |제목=3·1 운동 민족대표는 ‘33인’ 아닌 ‘48인’이었다 |url=https://news.joins.com/article/6704225 |출판사=중앙SUNDAY |저자= |날짜=2011-11-20 |확인날짜=2019-04-11 }}</ref>,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독립운동을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전개할 것임을 논의하였다.<ref name="보고서542"/> 손병희는 이곳에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독립운동 3대 방침을 제시하기도 하였다.<ref name="보고서542"/>
 
손병희는 [[3·1 운동]]을 주도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옥한 뒤 상춘원에서 요양하다가 1922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ref>{{뉴스 인용 |제목=孫秉熙氏絕望 |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2051900209203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2-05-19&officeId=00020&pageNo=3&printNo=629&publishType=00020 |출판사=동아일보(네이버) |저자= |날짜=1922-05-19 |확인날짜=2019-04-11 }}</ref><ref>{{뉴스 인용 |제목=[3·1 운동 100주년 기념 논고] 의암 손병희 선생의 생애와 사상 |url=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4689 |출판사=동양일보 |저자=이충호 |날짜=2019-02-26 |확인날짜=2019-04-11 }}</ref> 그 밖에 다른 천도교도들도 상춘원과의 연고가 있다. [[이종훈 (1858년)|이종훈]]은 천도교에서 나온 뒤 몇 년 간 상춘원에서 살았다.<ref>{{뉴스 인용 |제목=[민족대표 33인 열전] 33인 중 최고령자, 일제에 온몸으로 맞선 동학교도 |url=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Premium/at_pg.aspx?CNTN_CD=A0002511211&CMPT_CD=P0010 |출판사=오마이뉴스 |저자=정운현 |날짜=2019-03-08 |확인날짜=2019-04-11 }}</ref> 한편 [[홍병기]]는 1929년 7월 5일 신의주형무소에서 가출옥한 뒤 상춘원에서 아들 홍영섭(洪榮燮)과 같이 지냈다. 홍영섭은 상춘원 시절이던 1930년 8월 29일 전후, 숭인동에서 격문을 붙이다 체포된 적이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민족대표 33인 열전] 3·1 운동 후에는 고려혁명당 이끈 천도교 중진 |url=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Premium/at_pg.aspx?CNTN_CD=A0002512150&CMPT_CD=P0010 |출판사=오마이뉴스 |저자=정운현 |날짜=2019-03-22 |확인날짜=2019-04-11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