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94 바이트 추가됨 ,  1년 전
편집 요약 없음
잔글
{{왕 정보
|이름=고구려 민중왕<br> 高句麗 閔中王
|원래 이름= 高句麗 閔中王
|그림=
|그림 크기=
|본명=고해색주(高解色朱), 고해읍주(高解邑朱)
|재위=[[44년]] -[[음력 10월]] ~ [[48년]]
|부왕=[[유리명왕]]
|모후=
|왕후=
|섭정 = [[고재사]](44년 [[음력 10월]] ~ 48년)
|종교 =
|이전 왕=[[대무신왕]]
|다음 왕=[[모본왕]]
《[[삼국사기]]》에는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우로 나와 있고, 《[[삼국유사]]》에는 [[대무신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이 죽은 뒤 태자 [[고구려 모본왕|해우]](解憂)가 어리므로 대신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모본왕]]이 민중왕의 형이라 한다.
 
왕위에44년 음력 10월 보위 오른등극하였고 그해([[44년]]) 음력 11월에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45년]] 음력 3월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 음력 5월에는 나라 동쪽에서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 [[47년]]에 사냥을 나간 민중왕은 민중원(閔中原)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하고 그곳에 자신을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음력 10월에는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인 [[대승 (인물)|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한나라|한]](漢)의 [[낙랑]]으로 투항하였다. [[48년]]에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석굴에 장사지내고 묻힌 민중원의 지명을 따서 왕명을 민중왕(閔中王)이라 하였다.
 
민중왕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익명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