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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나라의 어떤 사람이 노나라 군주에게 오기가 마을 사람들을 살해하고 어머니의 장례식에 불참했던 일 등의 과거행적을 폭로하며 그의 심성이 잔인하다고 비방하였으며, 또한 위나라의 죄인인 오기를 등용한다면 노나라와는 같은 핏줄의 조상을 둔 형제국인 위나라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노나라 군주는 오기에게 의심을 품더니 그를 쫓아내 버렸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한비자》에서는 오기가 노나라를 떠나게 된 정황에 대하여 다른 기록을 전한다. 그에 따르면 노나라의 대부인 계손씨(季孫氏)가 노나라 군주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 오기는 노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오기에게 "지금 계손씨가 막 피를 보이고 있으니 앞으로 어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라며 걱정을 표하자 오기는 노나라를 떠나 [[진 (희성)|진나라]](晉)로 가버리고 말았다.<ref>《한비자》 22편 〈설림상〉</ref> 여기서 말하는 진나라란, 당시의 정황상으로 보건데 곧 삼진(三晉) 중 하나인 [[위 (전국)|위나라]](魏)를 말한다. 또한 이 기록 외에는 계손씨에게 살해당했다는 노나라 군주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오기가 노나라를 떠나게 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 위나라에서 ===
==== 위 문후 시대 ====
노나라노나라를 군주에게 버림받은떠난 오기는 당시 [[위 (전국)|위나라]](魏)의 군주였던 [[위 문후]]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섬기고자 하였다. 위 문후가 신하인 이극(李克)에게 오기가 어떤 사람인지 묻자, 이극은 오기에 대하여 "비록 탐욕이 있고 여색을 밝히지만 용병에 있어서는 [[사마양저]]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라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위 문후는 오기를 등용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위나라의 장군이 된 오기는 [[진 (영성)|진나라]](秦)를 공격하여 5개 성을 빼앗았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
 
이후당시에 오기가 유생(儒生)의 복장을 하고갖추고는 병법을 논하고자 위 문후를 배알하였는데, 위 문후는 일부러 오기의 앞에서 "과인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소."라 말하며 속내를 감추었다. 그러나 오기는 이미 위 문후가 몰래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그 앞에서 병법을 논하였다. 그의 식견과 언변에 감탄한 위 문후는 친히 자리를 마련하여 부인으로 하여금 오기에게 술을 따르게 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베풀었다.<ref>《오자병법》 1편 도국</ref>
 
위 문후는 오기가 용병에 능하고 청렴하며 공정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는 그를 황하 서쪽에 위치한 진나라와의 국경지대인 서하(西河)의 태수로 삼았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 ; 《오자병볍》 1편 도국</ref> 이후 오기는 제후국들과 76회에 달하는 싸움을 치러서 64회의 대승을 거두고거두었고 나머지 싸움도 패하지는비겼다고 않았다전한다. 오기의 공로로 인하여 위나라는 사방으로 1천 리에 달하는 영토를 얻었다.<ref>《오자병법》 1편 도국</ref>
 
==== 진나라와의 전쟁 ====
서하에 부임한 오기가 진나라를 상대로 벌인 전쟁은 그 기록이 구체적으로 남아있지 않고 《사기》 · 《한비자》 · 《오자병법》 · 《여씨춘추》 등에 단편적인 일화들만이 전해질 뿐이며 그 시기조차 불명확하다. 다만 위 문후 시대의 위나라는 진나라와 수차례 전쟁을 치른 일이 기록에 남아있는데, 여기에 오기가 개입한 것으로 생각된다.<ref>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 7 : 전국시대의 시작》, 위즈덤하우스, 2014</ref>
 
[[기원전 413년]], 진나라가 위나라와 더불어 싸워서 정하(鄭下)에서 이를 물리쳤다.<ref>《사기》 권15 육국연표</ref>
 
[[기원전 412년]], 위 문후의 아들인 [[위 무후|공자 격]](擊)이 진나라를 공격하여 번방(繁龐)을 포위하고 그 인민들을 몰아냈다.<ref>《사기》 권15 육국연표 ; 《사기》 권44 위세가</ref>
 
[[기원전 409년]], 위나라는 진나라를 정벌하고 임진(臨晉) · 원리(元里)에 성을 쌓았다.<ref>《사기》 권15 육국연표 ; 《사기》 권44 위세가</ref>
 
[[기원전 408년]], 위나라는 진나라를 정벌하여 정(鄭)에 이르렀고, 돌아와서는 낙음(洛陰) · 합양(合陽)에 성을 쌓았다.<ref>《사기》 권15 육국연표 ; 《사기》 권44 위세가</ref>
 
[[기원전 401년]],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양호(陽狐)에 이르렀다.<ref>《사기》 권15 육국연표 ; 《사기》 권44 위세가</ref>
 
==== 위 무후 시대 ====
[[기원전 396년387년]], 위 문후가 죽고 그 아들인 [[위 무후]]가 즉위하였다. 어느날은 무후가 서하에서 배를 타고 노닐다가 그 견고한 산의 형세를 살펴보고는 "나라의 보배"라며 감탄하였다. 그러자 마침 무후의 곁에 있던 오기가 예로부터 많은 군주들이 견고한 지형 만을 믿다가 패망하였다고 주장하며, "나라의 보배는 군주의 덕에 있을 뿐, 험한 지형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라는 간언을 올려 위 무후를 납득시켰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 ; 《전국책》 권22 위책1 〈위무후여제대부어서하〉</ref>
 
이후 위나라에서 전문(田文)을 재상으로 삼았는데,<ref>전문(田文)은 제나라의 [[맹상군]]과는 동명이인이다.</ref> 당시 서하태수로 대단한 명성을 날리던 오기는 자신이 재상이 되지 못한 일을 언짢게 여겼다. 오기는 전문을 찾아가 자신이 전문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전문은 자신의 공로와 능력이 비록 오기 만큼은 못하지만, 왕의 나이가 어려서 대신과 백성들이 나라를 받들지 않는 이 때에는 오기보다 자신이 재상이 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반박하여 그를 납득시켰다.<ref>《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