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동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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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흥]](元興) 원년([[402년]]), 혜원은 동지 123인과 함께 여산 산중의 반야대(般若臺)에 있던 [[아미타불]]상 앞에서 염불 실천의 서원(誓願)을 세우고, 백련사(白蓮社, 백련결사)의 조(祖)로서 모셔지게 된다. 다만 혜원의 염불행(行)은 후세의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기초한 전수염불(專修念佛)이 아니라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기초를 둔 [[지관 (불교)|선관]](禪觀) 과 같은 선종 수행법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당시 여산을 포함한 [[장강]](長江) 중류 유역의 [[패자]](霸者)로 군림하던 [[환현]](桓玄)에 대해서도 "불법(佛法)은 왕법(王法)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고 정면으로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다. 승려로서 계율을 굳건히 지킬 것을 강조한 혜원은 계율(戒律)의 정비에도 힘써서 《십송률》(十誦律)의 번역 및 보급에도 힘썼다. 이때 승려 가리파(伽提婆)가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4권과 《삼법도론》(三法度論) 2권을, 불타발다라(佛馱跋陀羅, 각현覺賢,359년 — 429년)가 《수행방편선경》(修行方便禪經)을 번역하였을 때 혜원은 이들 경전에 모두 서문을 써 주었다. 또한 요진에서 불경을 번역하던 승려 [[쿠마라지바]](鸠摩罗什)와도 편지를 주고 받으며 불교의 이치에 대해 논하였다. 천축에서 담마류지(昙摩流支)가 왔을 때 혜원은 자신의 제자 담옹(昙邕)을 보내어 그가 《십송률》을 번역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