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프리트 하인리히 추 파펜하임 백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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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정보
[[Image:Gottfried Heinrich von Pappenheim.jpg|right|200px]]
|이름=고트프리트 하인리히 그라프 주 파펜하임<br>Gottfried Heinrich Graf zu Pappenheim
|생애=[[1594년]] [[5월 29일]] - [[1632년]] [[11월 17일]]
[[Image:|그림=Gottfried Heinrich von Pappenheim.jpg|right|200px]]
|별명=
|태어난 곳=[[바바리아]] 알트뮐의 [[파펜하임]]
|죽은 곳=[[작센]]의 [[라이프치히]]
|설명=
|복무=[[그림: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after 1400).svg|22px]][[신성로마제국]]
|복무기간= - [[1632년]] [[11월 17일]]
|최종 계급=
|부대=
|지휘=
|주요 참전 전투/전쟁= [[30년 전쟁]]
|서훈 내역=
|기타 이력=
|}}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그라프 추 파펜하임'''(Gottfried Heinrich Graf zu Pappenheim ; [[1594년]] [[5월 29일]]~[[1632년]] [[11월 17일]])은 [[30년 전쟁]] 때 [[신성로마제국]]의 육군원수로서 제국의 통치권으로부터 자유로운 고대가문이 그들의 이름을 수여받은 유래가 된 [[바이에른]] 지방 알트뮐(Altmühl)에 있는 [[파펜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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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곧 폴란드의 부대 지휘관이 되었고 후위대로 남겨진 [[프라하]](Prague; [[1620년]] [[11월 8일]])근처의 [[백산 전투]]에서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었다. 다음해 그는 [[만스펠트]]와 서부 독일에서 격전을 벌였고, [[1622년]] 중장기병 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1623년]] 파펜하임의 주군의 동맹자이자 그의 믿음의 대표자인 에스파냐의 열렬한 친구로서 그는 이탈리아 전쟁에 군대를 일으켰고 [[롬바르디아]]와 [[그리손]]등에서 에스파냐군과 함께 군무에 종사하였다. 이때 파펜하임은 그를 앞에서 눈에 잘 띄게 한 [[가르다 호수]]에 있는 리바 초소에서의 길고 영웅적인 방어전을 수행했다.
[[Image:Wallenstein Hilfegesuch an Pappenheim 1632.jpg|thumb|200px|도움을 요청하는 발렌슈타인의 편지]]
1626년 동맹의 총사령관 [[바바리아의 막시말리안 1세]]는 그를 독일로 불렀고 [[오스트리아]] 북부에서 일어난 위험한 반란의 진압을 파펜하임에게 일임했다. 파펜하임은 재빨리 임무를 수행하며 절망적인 지역에 반격을 시도했으나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몇주만에 그는 폭동을 잔혹하고도 혹독히 분쇄하였다. 이후에 그는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틸리 백작]]휘하에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를 격파했고 [[볼펜뷔텔]]을 공략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Braunschweig-Wolfenbüttel)의 왕좌를 차지하고 지배권을 얻으려는 그의 야망은 긴 책략끝에 명확히 실패했다.
 
[[1628년]] 파펜하임은 제국의 백작이 되었다.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공방전에 종군한 후 파펜하임은 틸리와 같이 야만적이고 잔인한 처사로 비난받았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 같이 볼펜뷔텔에서의 실망때문에 파펜하임은 마그데부르크의 유용한 지배권을 얻고자 열망했고 이것이 힘들어지자 파펜하임은 고의로 부의 근원을 파괴했다. 좌우간 마그데부르크 공방전은 17세기의 다른 어느 도시에서 행해진 공방전보다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Image:Wallenstein Hilfegesuch an Pappenheim 1632.jpg|thumb|200px|도움을 요청하는 발렌슈타인의 편지]]
 
군사적 관점에서 파펜하임의 행동은 훌륭했다. 그의 방법은 숙련되었고 그의 개인적인 무용은 언제나 눈에 띄었다. 그래서 대다수는 [[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브라이텐펠트]]에서의 실패에 강렬한 돌격을 지휘할 때마다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이 맹렬한 기병지휘관의 전술의 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실지의 황제군을 관심과 기술로 재집결시키고 파펜하임은 [[라인 강]] 하류와 [[베저 강]]에서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구스타프 아돌프]] 휘하의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스웨덴 왕을 위한 좀 더 시급한 증원은 파펜하임의 작고 재육성된 군대에의해 독일의 북서부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전은 광범위했고 그의 쉼없는 움직임은 카셀에서 슈타데(stade), 힐데스하임에서 마스트리히트(Maastricht)를 제압했다. 새로운 황제군의 원수에 임명되고 그는 [[발렌슈타인]]과 합류하도록 소환되었다. 그리고 [[작센]]에서 스웨덴군에 대항하는 대원수를 지원하도록 명받았다. 그러나 다시금 라인 남부에 위치한 [[쾰른]]으로 급파되었다. 그의 부재로 대전쟁은 급박해졌고 파펜하임은 급박하게 소환되었다. 그는 그의 기병대와 함께 [[뤼첸 전투]]의 중반에 나티났다. 그의 분노에 찬 공격은 일순간은 성공적이었다. 마스턴 무어(Marston Moor)전투의 루퍼트가 [[크롬웰]]을 자신의 가장 뛰어난 라이벌로 생각했듯이 지금 파펜하임은 구스타프 아돌프를 그렇게 여겼다. 스웨덴왕이 죽은 거의 동시에 전장의 다른 지역에서 파펜하임 역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는 당일 혹은 그의 사체가 보존된 플라이센부르크(Pleissenburg)가 있는 [[라이프치히]]로 가는 도중의 아침에 사망했다.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