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샤오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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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부터 1989년 5월까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객원 연구원 자격으로 체류하던 도중에 중국에서 [[1989년 천안문 사건]]이 발생하자 귀국하여 시위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마오쩌둥 비판을 동양의 전통 문화와 연계하는 한편 중국 정부의 [[공자]] 비판에 휩쓸린 [[자오쯔양]]이 참여한 5·4 운동 70주년 기념 집회에 참여하였다. 또한 청년 대표 가운데 하나의 진영으로 앞서 중국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1989년 4월 27일부터 6월 4일까지 진행된 비폭력 민주화 요구 시위에 참가하여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천안문 사태에 대한 정부 측의 입장을 요구하였지만 학생들은 가급적 천안문 광장을 떠나 학교로 복귀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ref name="cbs">{{뉴스 인용 |url=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602474 |제목=중국은 왜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을 반대하나}}</ref> 이후에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천안문 사건에 대해 정부 측 입장을 요구하던 시위파로 계속 있었지만 1989년 6월 6일에 중국 공안 당국에 체포된 이후에 베이징에 위치한 친청 감옥에서 20개월 동안 구속 조치를 받았고 1989년 9월에는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다.
 
베이징 사범대학 교수이자 노동 운동가로도 활동했던 그는 [[문화 대혁명]] 시대에 [[사인방]]의 조반파 노릇을 했던 당시 동년배 혹은 그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선배 세대의 몇몇 지식인들처럼 중국의 당시 역사적 변화의 무거운 흐름을 제대로 감지하지는 못하였다.<ref name="cbs"/> 1991년 1월에 석방된 이후부터 베이징에서 문필 활동, 인권 운동, 민주주의 운동에 참여하던 도중에 1995년 5월 8일에 다시 중국 공안 당국에 체포되었다. 1996년 1월에 석방된 이후에 민주주의 운동과 문필 활동을 재개했지만 천안문 사건에 희생된 노동자들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여 다시 체포되고 만다.
 
1996년 10월 8일부터 1999년 10월 7일까지 법원으로부터 사회 질서를 교란시킨 혐의로 노동 개조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석방 이후에는 베이징에 위치한 자택에서 프리랜서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정치 평론과 학술 논문을 집필하는 한편 반체제 잡지 기고자로도 활동했다. 2003년 11월에는 중국 독립문필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2005년 11월 2일에는 중국 독립문필회 회장으로 유임되었다. 2004년에는 [[국경 없는 기자회]]와 프랑스 기금회로부터 언론의 자유 수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