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중심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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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이후 두드러진 [[스콜라주의]]적 사조의 주요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저술한 『[[신학대전]]』에 따르면, 지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을 받아들였으며, 신과 인간의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인 '지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후 [[스콜라주의]]자들은 대부분이 [[천동설]]을 근거로 목적론적 [[기독교]]관을 설파했으며, 15세기에 이르러선 이러한 해석이 서구유럽 기독교 내에서 주류적 관점으로 잡히기 시작한다.
 
다른 사례로,* [[조르다노 브루노]]가 화형을 당할 때의 죄목 중 첫 번째와 후에 추가된 약 20가지의 죄목 중 다섯 번째와 관련된 "신이 창조한 행성들 외 다른 행성을 논하고 있으며, 행성에 관한 여러 가지 무지를 드러냄" <ref>Che si trovano più mondi, che tutte le stelle sono mondi, ed il credere che sia solo questo mondo è grandissima ignoranza.</ref>에 대한 목록 중에는 지동설에 관한 내용도 포함이 되어있으며, 이 내용은 [[이탈리아]]의 사학자인 Luigi Firpo가 [[1949년]]에 낸 『Il processo di Giordano Bruno』(조르다노 브루노 재판)에서 상세히 논해지고 있다. 혹자는 해당 죄문은 [[헤르메스주의]], 칼뱅주의라는 복합적인 요소와 얽혀져있기에 지동설에 대한 반감은 아니다라고 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내용 자체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지동설의 기본적인 전제(또는 결론적 입장)에 대해서 기본적인 입장을 내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당시 [[기독교]]가 지동설에 대한 좋지 않은 관점을 교리적 원인으로부터 갖고 있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브루노가 칼뱅파가 되었다는 내용은 브루노 사후 약 100년 후에 발견된 개혁교회 이탈리아 난민 리스트에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떠도는 설인데, 학계에서 그가 [[칼뱅주의]]자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며, 인정한다고 해도 잠깐 받아들였으나 얼마 안 가 칼뱅주의와도 결별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브루노 사후 16년 후에 행해졌기에, 지동설 탄압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역시 오류가 포함된 주장이다. [[1551년]] 때 [[교황청]]은 역법 개정 때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이용하였다. 따라서 그의 저서를 바로 금서로 지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출판 후 약 70년 후 시점에서 금서가 된 것이다. 또한, 출판 당시만 해도 바티칸에서는 그의 서적을 금서로 지정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1차 금서화 된 [[1616년]]은 지동설 근거가 폭발적으로 나타나던 [[1610년대]] 초반의 시기와 겹치며, 동시에 이 시기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서적이 다시금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ref>『아무도 읽지 않은 책』(오언 깅거리치, 지식의 숲, 2008) pp. 226-227</ref><ref>원래 해당 저서는 당시 거의 읽히지도 않던 서적이었다. 즉, 16세기 중후반 시점에서 [[가톨릭]] 계통이 무리하게 금서로 지정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ref>
 
또한,* [[프톨레마이오스]]가 "지구가 중심에 있다는 것은, 지구의 가치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지구는 우주적 차원에서 한 점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으로 [[기독교]]가 지구중심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지녔는지 설명하려고 하는 움직임도 존재하는데, 애초에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며, 당시는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기 전이었다. 따라서 그의 주장으로 기독교가 지동설과 [[천동설]]에 대해 어떠한 교리적 입장을 지녔는지 증명하는 것은 온당한 논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교황청]]이 지동설을 가설 차원으로 다루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현재적으로 유지되는 학설(천동설)과 비교하여 해당 학설을 더 견고화하는 용도에서의 '가설' 차원으로서 다루는 것을 허용한 것일 뿐, 이를 정설로까지 발전시킬 정도로 지원을 한다거나 학제에 편입시키겠다는 뜻은 전혀 아니었다. 반론자들은일부 신학자의 경우는 [[1630년]]에 출판된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의 내용을 거론하면서, 마치 이 서적이 지동설에 대한 진지한 설파보다는 천동설론자를 완전히 천치로 만드는 목적 외에 쓰여지지 않았기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탄압을 받은 것마냥 서술하지만, [[천동설]]론자가 천치로 묘사되는 것과는 별개로 진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당시 지동설 탄압을 마치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대립으로 설명하면서, 예민해진 [[가톨릭]]에 의해 제재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틀린 말이다. 개신교라고 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으며, 당시 주류적 흐름을 비판했던 개신교 쪽도 역시 지동설에 대해서 심한 비판을 가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례로 루터는 "사람들은 하늘이나 태양과 달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애쓴 한 건방진 점성가에게 귀를 기울인다. 영리해보이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이건 어떤 새로운 체계 물론 모든 체계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체계를 고안해 내야 한다.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집어 놓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스러운 복음서는 여호수아가 태양에게 정지를 명령했지 지구에게 한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ref>러셀, 『종교와 과학』 참조</ref>라고 지동설을 평하기도 했다.<ref>『신학과 현장』(김승철, 목원신학연구소, 2009)</ref> 따라서, [[가톨릭]]의 제재는 종교 대립으로 예민해진 것 때문이라는 말은 단순히 교리 상의 문제라는 것을 희석시키는 의도로 보일 수밖에 없으며, 가톨릭 계열에서 상대가 개신교라는 것을 들씌우며 정치적 공세를 취할 때, 지동설 또는 [[천동설]] 여부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정치적으로 예민해진 시기라, 탄압의 수위가 과거에 비해 높아지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볼 때 개혁교회와의 대결이 지동설 탄압으로 이어진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자체의 교리상 문제로 넘어가는 게 자연스럽다.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자금적으로 지원했던 신자들의 존재와 별개<ref>반론자들 중 소수는 이 지원이 지동설 이론에 대한 지원이라고들 하나 이에 대한 근거는 없다.</ref>로, 지동설이 교리와 어긋나는 것이라는 입장을 가진 당시 발언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예수회 신부인 잉꼬페르(Melchior Inchofer)는 지동설에 대해 "이단적이면서도 가장 유해한 것이다."라고 평가할 정도였으며, "신의 현현을 반대하는 논증은 지구가 움직임을 보여 주려는 논증에 비하면 오히려 관대한 취급을 받아야 한다."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또한 감리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경우도 역시 지동설을 이단적이라고 평가했다.<ref>『신학과 현장』(김승철, 목원신학연구소, 2009) p. 17</ref> 또한, 갈릴레이가 [[요하네스 케플러]]의 원운동 법칙을 거부한 것은 사실이나, 이후에 개량된 [[망원경]]을 통해 [[금성]]의 [[위상]] 변화와 목적의 위성 및 [[태양]] [[흑점]] 변화를 관찰하여서 다른 실증적 근거를 내놓았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ref>* 『코페르니쿠스 연구: 사상의 기원과 과학사에서의 위치』(임진용, 경상대학교 대학원, 2012년) p. 121</ref>
 
또한, 갈릴레이가 [[요하네스 케플러]]의 원운동 법칙을 거부한 것은 사실이나, 이후에 개량된 [[망원경]]을 통해 [[금성]]의 [[위상]] 변화와 목적의 위성 및 [[태양]] [[흑점]] 변화를 관찰하여서 다른 실증적 근거를 내놓았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ref>* 『코페르니쿠스 연구: 사상의 기원과 과학사에서의 위치』(임진용, 경상대학교 대학원, 2012년) p. 121</ref>
 
실제 [[과학]]과 [[종교]]의 갈등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권위에 대한 도전과 싸움이다.종교는 과학과는 달리 권위를 통해서 대상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중세 스콜라철학자들로부터 그 권위의 실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그들은 성서, [[가톨릭]] 신념과 관련된 교리,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가르침에 대해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오직 그 권위로 부터 나온 강령에 따라 모든 것을 이해하고 행동하려 했다. 따라서 어떤 대상일지라도 관찰과 실험에 의존하기보다 성경 복음서나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으로부터 추출된 연역(演繹)과정을 거쳐야만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ref>* 『코페르니쿠스 연구: 사상의 기원과 과학사에서의 위치』(임진용, 경상대학교 대학원, 2012년) p. 127</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