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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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학자입니다. 본인 논문을 올릴 수는 없으니 다른 문서처럼 넷상 출처를 쓴 것이지요. 눈을 좀 재대로 씻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쪽은 항상 그쪽이 쓰는 글은 유력하다 이러는데 역사학에 유력설이 있습니까? 단군과텡그리설은 유명한 학설인데 기타로 굳이 옴기는 것은 친중성향때문이 아닌지요? 의도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눈 씻고 봐도 이런 발언은 상대방에게 기분나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중국어 번역해서 옴기는 건은 사학이 아니고 번약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조선이 사대관계에서 생겨난 허위 역사라는 것이 유력하다~ 이건 인정하시죠? xakyntos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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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단군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경에<ref>{{서적 인용 |제목= [[동국사략]] | 저자= [[권근]] 등 |연도= 1402 |장= |인용문=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웠다.(당요 25년 무진년) (國人立爲君(唐堯二十五年戊辰)}}</ref><ref>서력으로 계산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단군기원]]을 참조.</ref> 아사달(阿斯達) 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단군조선|조선]]을 건국하여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전해지며, 단군의 뒤를 이어 [[기자 (고조선)|기자]]가 조선을 다스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자 조선은 한국 학계에서는 인정하고 있지 않다. 단군은 고조선의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1000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하는 기록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이미 단군은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누대에 걸친 국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ref>《[[동국통감]]》 〈외기(外紀)〉, 1485년.</ref>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응제시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三朗城)을 쌓고 태자 부루(夫婁)를 파견해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맹(塗山會盟)에 참석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