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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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일으킨 각 성에는 입헌을 추진하던 신사층의 권력의 중추를 차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일된 중앙정부를 조직하기 위해 [[한커우]]의 영국 [[조계]]지에서 각 성 대표가 모여 [[1911년]] [[12월 3일]] 《중화민국임시정부 조직대강》을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난징]]에 두기로 했다. 그리고 [[12월 25일]] 귀국한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함으로써,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은 난징으로 가 총통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ref name="신해혁명"/>
 
[[파일:Republic of China proclaimtion.png|섬네일|오른쪽|1912년 1월 1일 선서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던 썬야만 센.]]
[[난징]]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쑨원]]은 각 성의 대표로 임시참의원을 구성하고 총통 중심제의 '중화민국 임시 정부 조직 대강'을 내각책임제의 《임시 약법》으로 개정했다. 그런데 청조는 혁명 진압군 장교에 영향력이 큰 데다 열강의 신임을 얻고 있던 [[위안스카이]]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해 전권을 위임한 터였다. 위안스카이는 무력 진압보다는 혁명군과의 타협을 통한 해결을 추진했다. 호북군정부나 혁명에 가담한 각 성 대표는 [[위안스카이]]가 공화정 수립에 가담하면 총통으로 추대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므로 [[쑨원]] 역시 남북 간의 협상을 통한 해결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ref name="신해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