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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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한반도 남부 통합은 [[고구려]]의 영토를 상당부분 상실했다는 점에서 영토적인 면에서 분명 한계이다. 또한 [[한반도]]내에서 민족국가의 정체성은 있었으며 이는 [[고려]]나, [[한반도]] 내에서 민족국가의 정체성은 [[고려]]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라의 백제 - 고구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재편은 분명 삼국이 존재하던 시기의 영토 세력에 비해 축소된 부분이 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신라 통일 정책의 부정적인 부분으로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이다. 마찬가지로 외세인 당을 끌여들여 전쟁을 통해 신라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던 것도 충분히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는 현 시대의 관점에서 당시를 해석하는 해석의 오류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에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으며(다만, 고구려 지배층이 건국한 백제는 건국이후 주몽의 제사를 모셨던 것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동질감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전사하고 백제 아신왕과 개로왕이 각각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공격으로 죽은 것을 볼 때 후대로 갈 수록 양국간의 동질성도 약화되었을 수 있다) 단지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국가였다.
정치적 계승 의식외에 일반 민들 간 동질성이 유지되려면 기본적으로 그 지역에서 오랜시간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왔다는 유대정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삼국의 건국 전 초기 국가들의 형태를 보면 교통수단의 한계와 강, 산 등의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활발한 교류가 어려웠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삼국의 건국설화를 살펴보면 그 지역에서 세력을 갖고 있던 토착세력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유이민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의 경우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자신들의 세력을 이끌고 남하해 마한의 소국인 백제국에서 출발하여 다른 마한의 소국들을 병합, 한반도 서부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주몽은 부여에서, 박혁거세는 진한 지역이 아닌 북방으로부터 온 이주집단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들간 동질의식이 완전히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지금과 같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또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여 병합하는 약육강식의 당시 세계관에서 삼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본인들이 살아남지 못하면 다른 나라에 멸망당하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통해 고구려를 견제했고, 신라의 전성기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체결하여 신라와 수, 당을 견제했다. 신라의 수-당 동맹과 백제, 고구려 공격을 동족의식을 져버린 반민족적 행위로 규정하는 것은 해석의 비약이다.
신라가 수,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백제와 고구려가 외부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만큼 내부 상황이 위태로웠던 각국의 상황적 요인들과 법흥왕 이후부터 정비되어온 신라의 내부 체제, 김유신과 김춘추라는 인물의 등장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여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것은 의미없는 이야기이지만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광개토대왕~장수왕 시기와, 백제의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근초고왕 시기에도 그들이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외부적 요인들이 적절하게 뒷받침되었다면 삼국의 통일은 신라가 아닌 백제나 고구려가 이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추진하던 시기 고구려와 백제의 내분이 격화되면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요건이 갖추어졌고, 당과의 연합으로 부족했던 군사력까지 더해지면서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신라가 당을 끌여들인 점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분명 한계로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나, 지리적으로 동쪽에 치우쳐 있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고구려-백제-왜로 이어지는 남북의 동맹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이들을 견제하기 위한 다른 세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남북국시기 발해가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음에도 일본에 사신을 보내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진흥왕 시기 확장한 영토로 인해 고구려, 백제와는 관계회복이 힘들만큼 적대국가가 되었으며 남북으로 고립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저 나라가 망하기만을 기다리는 군주는 없을 것이다. (실제 선덕여왕시기 백제군의 침입으로 수도였던 경주에서 멀지 않은 대야성(지금의 합천)까지 잃었으니 신라의 입장에서는 당과의 동맹이 무척 절실했을 것이다) 하여 당과의 동맹을 바라보는 부분에 있어서도 지금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외세를 끌여들인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았을 때는 외세가 아닌 국가의 존립을 위한 동맹세력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삼국이 중원의 국가, 일본 열도에 존재했던 왜와의 동맹을 맺는 상황들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최초의 통일 국가를 어디로 보는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개개인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단정적으로 이것이 절대적이고 옳은 주장이다라고 할 수는 없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과거인들이 남긴 기록이나 흔적들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해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당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당시의 시각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신라의 삼국통일 주장에 대해 영토의 축소라는 부분의 한계는 분명 있으나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중앙군인 9서당에 백제와 고구려 출신들을 배치했던 점, 유민들을 강제 이주 시켰던 당과는 달리 기존에 살던 지역에서 생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지역의 지방관 역시 그 지역 출신을 중용하였던 점, 통일 이후 신라의 문화가 이전의 문화와는 달리 백제 문화의 영향을 받은 문화재들이 남아있는 점 등을 통해 볼 때 문화적, 정신적으로 융합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는 한계가 있을지라도 삼국을 자신들이 통일했다는 신라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영토를 온전히 회복한 것으로 이야기하려면 삼국시대 이후 완전하게 통일을 이룬 국가는 없었다. 고려 역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회복했을 뿐이었다. 뒤이은 조선 역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하는 영토를 획정하면서 고구려와 발해가 영위했던 영토에 대한 완벽한 통일은 이룩하지 못하였다.
비록 주변의 변화에 따라 영토적인 부분에서는 완전한 통일은 이룩하지 못하였더라도 신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신라의 사회층에 흡수하려 노력하였으며, 고려의 경우에는 국호에서도 볼 수 있듯 고구려를 계승의식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도 보이듯이 고려 중기로 갈수록 지배층은 고구려 계승의식 보다는 신라 계승의식이 강했으며 이는 지배층을 이루고 있는 세력들의 출신이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 남북국 시대 신라의 발전: 왕권의 강화와 제도의 정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