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기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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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이후가 되면 팔기만주, 팔기몽골, 팔기한군 등을 모두 포괄하는 기인에 대한 통칭이 만주족이 되었으며, 20세기 초에는 기족(旗族)이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하였거니와, 오늘날 중국에서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만족(滿族)이란 팔기에 속했던 기인의 후손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팔기제에 의한 민족 정체성의 형성과 지속을 증명하는 것이다.<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authorlink=|title=청나라, 키메라의 제국|series=서울대 인문 강의|publisher=민음사|isbn=9788937484940|page=107~108}}</ref>
 
== 고려좌령과 조선좌령 ==
1616년, [[누르가치]]가 [[흥경|허투 아라]]에서 나라를 수립했다. 그 후 후금은 점차 서남, 서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 1621년에는 수도를 [[랴오양]]에, 1625년에는 다시 [[선양시|묵던]]으로 천도하면서 만주 지역 전역을 장악하였다.
 
[[건주여진]]의 이러한 국가적인 발전과 대외 팽창은 외족에 대한 납치와 수탈을 동반하고 있었다. 건주여진은 세 차례의 전쟁을 통하여 수많은 조선 병사와 조선인을 전쟁 포로 혹은 피랍인으로 만주 지역으로 끌고 갔다.
 
1619년 후금과 [[명나라]]은 만주 지역의 패권을 다투는 [[사르후 전투]]를 벌였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고, 이 전투에 오도 원수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 1만 3,000명을 파견하였다. 후금군의 포위에 빠지면서 조선군 좌우영은 일시에 무너지고, 강홍립은 중영을 이끌고 후금 군대에 투항하였다. 투항한 4,000여 명의 조선 군대 가운데서 500여 명이 두 차례에 걸쳐 후금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었다. 그 외의 2,700여 명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조선으로 도망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도망하던 산간계곡 도처에는 아사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하였다.<ref>李民寏, 「柵中日錄」, 遼寧大學歷史系 編,. 『淸初史料叢刊』第8, 9種, 25쪽.</ref> 여기서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병사가 후금의 포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에서 청군에게 납치된 조선인은 더욱 많았다. 정묘호란에서 [[평양]]·엄격(掩骼)·강동(江東)·삼징(三澄)·순안(順安)·함종(咸從) 등 6개 지방에서만 납치당한 자가 4,986명이나 된다고 한다. 1636년 병자호란 시기의 상황도 비슷하였다. [[수원]] 지역 격전에서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지원 나온 병사들이 절반 넘게 포로가 되고, 수많은 피란민들도 잡혀서 만주로 끌려갔다. 1637년 [[인조]]가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볼모로 묵던에 보내 전쟁 포로와 납치당한 조선인들을 되돌려받으려고 선양관(瀋陽館)에 갔을 때, 묵던성 남문 밖에 몰린 피랍자만 하여도 수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 차례의 전쟁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전쟁 포로 혹은 강압적인 납치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속환되었거나 도망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조선인들은 만주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만주에 남았던 조선인들은 극히 일부분이 팔기군에 편입되고, 대부분은 [[만주족|만주]] 왕공 귀족의 노예로 전락하였다.<ref>재외동포사 총서 13, 《중국 한인의 역사》 (상)</ref>
 
다양한 경로를 거쳐 팔기만주에 들어온 조선인의 상황은 《[[팔기만주씨족통보]]》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 사료에는 팔기만주 소속의 1168개 성씨가 종족 출신별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고려, 즉 조선의 성씨 43개가 포함되어 있다. 《팔기만주씨족통보》는 고려 43개 성씨를 권72와 73에 나누어 수록하였는데, 권72에는 독자적인 전기를 둘 만한 인물 11명을 배출한 7개 성씨, 권73에는 나머지 36개 성씨가 등재되어 있다.
 
《팔기만주씨족통보》 권72와 권73에 등장하는 인물 157명 중에서 약 84퍼센트에 해당하는 132명이 포의 니루 소속이었다. 이는 팔기에 편입된 조선인이 대개 양대 호란 당시 포로로 끌려가 노복 신분으로 팔기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열하일기]]》를 보면 박지원이 열하에서 만난 귀주안찰사 기풍액이 본래 성이 황씨인 조선인 후예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기풍액 역시 정백기 만주의 포의 니루 소속이었다.
 
== 조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