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기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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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가치는 이런 방식으로 팔기를 조직함으로써 통일된 여진의 결합력을 강화하고 [[반란]] 가능성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팔기만으로 통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636년]], [[숭덕제]]는 만주와 몽골의 왕들과 [[한족]] 무장들에게 추대되어 세 민족을 주축으로 하는 [[대청국]]의 황제에 즉위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만·몽·한의 삼분 체제가 팔기에 적용되어 갔다. 몽고 니루는 [[1635년]]에 정식으로 분리되어 몽고 궈사({{llang|mnc|{{MongolUnicode|ᠮᠣᠩᡤᠣ<br>ᡤᡡᠰᠠ}}|Monggo Gūsa}})가 되었고, 한인 병사는 [[1637년]]에서 [[1642년]] 사이에 팔기 가운데 한군(重軍, {{llang|mnc|{{MongolUnicode|ᡠᠵᡝᠨ<br>ᠴᠣᠣᡥᠠ}}|Ujen Cooha}})으로 조직되었다. 몽고 부대와 한인 부대가 독자적인 궈사로구사로 떨어져나가면서 기존의 궈사는구사는 만주 궈사구사({{llang|mnc|{{MongolUnicode|ᠮᠠᠨᠵᡠ<br>ᡤᡡᠰᠠ}}|Manju Gūsa}})로 불리게 되었다. [[1642년]]에는 '''만주팔기'''(满洲八旗, {{llang|mnc|{{MongolUnicode|ᠮᠠᠨᠵᡠ<br>ᠵᠠᡣᡡᠨ<br>ᡤᡡᠰᠠ}}|Manju Jakūn Gūsa}})에 '''몽고팔기'''(蒙古八旗, {{llang|mnc|{{MongolUnicode|ᠮᠣᠩᡤᠣ<br>ᠵᠠᡣᡡᠨ<br>ᡤᡡᠰᠠ}}|Monggo Jakūn Gūsa}})와 '''한군팔기'''(漢軍八旗, {{llang|mnc|{{MongolUnicode|ᡠᠵᡝᠨ<br>ᠴᠣᠣᡥᠠᡳ<br>ᠵᠠᡣᡡᠨ<br>ᡤᡡᠰᠠ}}|Ujen Coohai Jakūn Gūsa}})이 더해짐으로써 24개의 구사가 창설되면서 마침내 완전한 팔기제가 구성되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ref>
 
[[1634년]]부터 [[1640년]]까지 흑룡강 유역의 광대한 지역을 원정했고, 투항시킨 소론(索倫, Solon), [[에벤키족|어웡키]], [[오로촌족|오로촌]], [[다우르족|다후르]]와 [[야인여진|동해여진]]의 일부를 만주팔기의 일부로 편제했다. 이때 팔기에 편입된 이들은 새로운 만주라는 의미로 '신만주'(新滿洲, {{llang|mnc|{{MongolUnicode|ᡳᠴᡝ<br />ᠮᠠᠨᠵᡠ}}|Ice Manju}})라고 불렸다. 이들 신만주를 제외한 본래의 만주는 자연스럽게 구만주(舊滿洲, {{llang|mnc|{{MongolUnicode|ᠮᠠᠨᠵᡠ<br />ᡤᡡᠰ}}|Ice Manju}})로 불리게 되었다<ref>劉小萌, 「關於淸代“新滿洲”的幾個問題」, 『滿族研究』, 1987, 3쪽</ref> 또한 [[흑룡강]] 유역에서 포로로 잡은 [[코사크|러시아인]]과 [[타이완]]에서 투항한 [[정씨왕국|정씨 집단]]이 각각 니루로 조직되어 만주팔기와 한군팔기에 편입되었다. [[건륭]] 연간에는 [[위구르]] 무슬림과 [[티베트인]]으로 구성된 니루가 새로 조직되어 만주팔기에 편입되었고, 베트남에서 밀려난 레(黎)씨 왕조의 망명 집단 역시 니루로 조직되어 한군팔기로 편입됐다.<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authorlink=|title=청나라, 키메라의 제국|series=서울대 인문 강의|publisher=민음사|isbn=9788937484940|page=}}</ref>
 
팔기 중 상위 3개 깃발군(정황기, 양황기, 정백기)는 [[청나라의 황제|황제]]의 직속부대이고 나머지 5개의 깃발군은 여러 제후들의 관할이다. 중국을 정벌하는 기간 동안 팔기제은 점차 전문적이고 관료적인 기관으로 변모했다. 청 제국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팔기군은 청의 정예군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