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덕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m 모바일 앱 안드로이드 앱 편집
105번째 줄:
 
같은 해, 숭덕제는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감찰 기관인 도찰원(都察院,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ᡠᡥᡝᡵᡳ<br>ᠪᡝ<br />ᠪᠠᡳᠴᠠᡵᠠ<br />ᠶᠠᠮᡠᠨ}}|Uheri-be Baicara Yamun}})을 설립했다. 도찰원의 임무는 황제이게 간언하고, 버이러와 대신들의 불법을 규찰하며, 닝군 주르간을 감찰하고, 논의와 상주에 참여하며, 사건을 심리하는 것이었다. 도찰원도 버이러들의 권력을 잠식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8}}</ref> 숭덕제는 더 이상 여러 친왕(親王, {{llang|mnc|{{MongolUnicode|ᠴᡳᠨ<br />ᠸᠠᠩ}}|Cin Wang}})과 동등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유일한 황제([[천자]])였고, 기의 수장들은 관료의 일부분이었다. 이 움직임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했다. 하나는 남쪽의 광활한 땅을 정복하는 데에 적합한 최상의 정치 조직 형태를 제공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명 황제에게 도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ref>{{서적 인용|author=William T. Rowe|authorlink=|title=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series=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27-9|page=40}}</ref>
 
홍 타이지는 총 다섯 차례에 걸친 중원 침공 중에 북경성을 포위하기도 하고 북경 인근 지역과 산서·산동의 여러 주현을 약탈하며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성도 거점으로 유지하지 못했다. 산해관을 피해 화북으로 우회하는 행군이 효과적인 전략이기는 했지만, 산해관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상 진정한 의미의 정복 전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홍 타이지는 먼저 산해관 외곽의 4개의 성, 즉 금주, 송산, 행산, 탑산을 공략하여 산해관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1640년 3월 18일, 홍 타이지가 지르가랑과 [[아이신기오로 도도|도도]]를 각각 좌·우익 군의 대장으로 임명하여 금주 근방에 주둔시키고 둔전을 행하여 공격 거점을 구축함으로써 송산(松山)·금주(錦州) 전투가 발발했다.
 
1642년 4월, 마침내 홍 타이지는 송산·금주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산해관 외곽 2백 리 지역의 명의 군사 거점을 붕괴시켜 관외 지역을 석권하고 산해관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함으로써 산해관을 통한 중원 진입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송금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요서 지역을 거점으로 확보하자, 한졷 관료들은 좀 더 과감하게 북경을 직접 공격할 것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홍 타이지는 무리해서 산해관을 장악하거나 북경을 점령할 의도가 없었고, 가능하다면 명과 화의를 맺고 청 내부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해 10월 홍 타이지는 아바타이를 봉명대장군(奉命大將軍)에 임명하여 제6차 중원 침공에 나서게 하였다. 이번에도 산해관을 우회하여 장성을 넘어간 청군은 북경 외곽을 거쳐 산동까지 거침없이 누비며 약탈전을 수행하였다. 이때 총 88개 성을 점령하고 금 1만 2천여 량, 은 220만 량, 포로 37만 명, 타마(駝馬)·나려(騾驢)·우양(牛羊) 32만 마리를 획득하였다. 이듬해 6월 8개월 동안 신속한 이동으로 인한 군사들의 피로로 인해 묵던으로 귀환할 때까지 청군은 장장 8개월간 북경 인근 지역과 산동 일대를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다녔다.
 
====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