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셔먼호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 개의 출처 구조, 0 개의 링크를 깨진 것으로 표시 #IABot (v2.0beta14)
24번째 줄:
 
== 배경 ==
19세기 중반, 서구의 열강들은 아시아에서 새로운 통상을 개설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중국 및 동남아시아에서의 통상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매튜 C. 페리|매튜 페리]] 준장이 1853년 7월 8일 에도(현재의 도쿄) 부근의 [[우라가]] 항까지 항해한 뒤, 일본도 통상을 개방하였고, 미국의 무력의 위협 하에 일본과 미국은 1854년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일찍이,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이었던 1832년의 미국에서는, [[:en:USS Peacock (1813)|피콕 호]]에 승선했던 [[에드먼드 로버츠]]에 의하여 조선의 통상 개방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미국은, [[제1차 아편 전쟁]](1840~42년)의 여파로 힘을 잃은 청나라와 [[왕샤 조약]](1844년 7월 3일)을 맺어 불평등한 통상을 개시하였다. 이 조약은 처음으로 [[아시아]]가 미국의 상인들에게 문을 여는 결과를 가져왔다. 같은 해에, [[미국 의회]]는 조선의 문호 개방을 위한 안건도 마련하였으나,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어쨌든 미국과 조선의 첫번째 접촉은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1853년 [[:en:USS South America (1861)|사우스 아메리카 호]]가 일본으로 항해하던 도중, [[부산]]에 입항하여 열흘을 머물렀다. 이때, 이 배의 관리들은 조선의 관리들과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1855년, 65년, 66년에 조선에서 난파되었던 여러 번의 사례에서도 미국인들은 잘 대우받았고, 본국 송환을 위하여 [[청나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ref>Kim Young-Sik, Ph.D. 〈[http://www.asianresearch.org/articles/1462.html The early US-Korea relations (Excerpt from "A Brief History of the US-Korea Relations Prior to 1945")] {{웨이백|url=http://www.asianresearch.org/articles/1462.html |date=20150923175246 }}〉 2003-7-25</ref><ref>U.S. Diplomatic Correspondence, 1870</ref> 그러나, 조선 조정은 제1차 및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중국을 전통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세력이 축출된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비슷한 재앙을 피하고자, 외부 세계와의 교역을 엄격히 금지하는 정책([[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 결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