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대한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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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로,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조선 헌종|헌종]]의 모후인 [[신정왕후 (조선)|조대비]]와의 약속으로 삼종숙부(三從叔父)인 추존 임금 [[조선 문조|익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익종(효명세자)의 양자 자격으로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 초기 10년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단계였고, 친정 이후에는 민씨 일가의 집권과 부패에 시달렸다. [[1880년]]대 이후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요구에 개항한 이래 [[청나라|청]]-[[일본 제국|일]]-[[러시아 제국|러]] 3국의 3파전 속에서 국권(國權)을 보존하려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이완용과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로 퇴위(退威)되었고, [[1910년]]에는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다시피 했다. [[1919년]] [[1월 21일]]에 사망한 뒤, [[고종 독살설]]이 시중에 유포되기도 했는데, [[윤치호]]에 의해 그 기록으로 전한다. 고종 황제 독살설은 [[3·1 운동]](전국적인 대규모 평화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008년 12월]]에 고종 황제 폐하께서 사용하셨다고 알려진 [[옥새]]가 발굴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17/2009031700338.html# |제목=고종 황제가 사용한 옥새 발굴 |확인날짜=2009-03-17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2405273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17/2009031700338.html# |보존날짜=2013-10-24 |깨진링크=예 }}</ref>
 
[[2009년]] 일본 국회 헌정(憲政)자료실에서,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고종황제폐하께서 즐겨 마셨던 식혜에 독약을 탔다”는 주장이 적혀 있는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의 사본이 발견되었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27/2009022701131.html "일본이 高宗황제 독살 지시" 日 고위관료 문서 첫 발굴] 2009년 2월 28일 [[조선일보]]</ref><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823010323300740010 “고종, 늑약 확인 거부땐 독살” 조선총독에 밀명] 2010년 8월 23일 [[문화일보]]</ref> 이안이의 후손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