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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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1926년에 발간된 조선명현초상화사진첩에 실린 김유신의 초상화
|시대 = [[신라]] 중고기(7세기)
|생애 = [[건복]](建福) 12년([[595년]]) ~ [[문무왕]] 13년([[673년]]) 7월 1일(양력 8월 18일) (79세)
|자(字) =
|다른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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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 관등: 태대각간, 직책: [[대장군]], 양하도총관, 봉상정경(당)
|주군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태종 무열왕]] → [[문무왕]]
|가문 = [[김해 김씨|가락(김해) 김씨]], 신김씨(新金氏)
|부모 = 아버지: [[김서현]], 어머니: [[만명부인]]
|친척 = [[김흠순]](아우)
|정당 = [[무소속]]
|배우자 = 영모 부인, 지소 부인
|자녀 = [[김삼광|삼광]](三光)]], [[김원술|원술]](元述)]], 원정(元貞), 장이(長耳), 원망(元望), 군승(軍勝) 등과 네 명의 딸
|사당 =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울산]] 은월사(隱月祠), [[군위]] 효령사, [[양산]] 취서사(鷲棲祠), [[진주]] 남악사(南岳祠), [[광주광역시|광주]](光州)]] 장렬사(壯烈祠), [[전주]] 완산사, [[부안]] 보령원(保寧院), [[부여]] 부풍사(扶風祠), [[정읍]] 태흥사(泰興祠), [[진천]] 길상사(吉祥祠), [[강릉]] 화부산사(花浮山祠), [[화성시|화성]](華城)]] 금산사(金山祠)
|기타 이력 =
}}
 
'''김유신'''('''金庾信''')은 [[신라]]의 무장이자 관인이다.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8월 18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의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이였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당나라군을 물리치며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무열왕|태종무열왕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보좌하였으며, [[진평왕|진평왕]](眞平王)]]부터에서 [[문무왕]]에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신라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의이후 역사에서뿐신라뿐 아니라 후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 출생생애 ==
=== 생애출생 ===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그는 [[금관가야|금관국]](金官國)을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 손이라고 한다.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은 [[법흥왕]](法興王) 19년([[532년]]) 세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으며,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구형왕]]의구형왕의 막내아들 [[김무력|무력]](武力)은 무장으로 활동하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백제 성왕|성왕]](聖王)을 잡아 죽이는 공을 세웠고, 무력의 장남이었던 아버지 [[김서현|서현]](舒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냈다.
 
어머니 만명(萬明)은 [[진흥왕]](眞興王)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보고 눈짓으로 꾀어서 마침내 서로 야합(野合)하게 되었는데,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전출되면서 만명도 함께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서현과 만명이 서로 야합한 것을 알게 된 숙흘종은 분노하여 딸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쳐서 별채를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만명은 창문으로 도망쳐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떠났다고 한다.
 
유신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595년]])에 아버지 서현의 부임지인 만노군에서 태어났는데, 《삼국사기》는 어머니가 그를 갖고 스무 달이 지나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서현은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만명은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유신을 갖게 되었으며, 원래 경진일 밤에 서현이 꾼 태몽으로 얻었다 하여 이름을 경진으로 지으려던 것을,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예기]](禮記)》의 말에 따라, 경(庚)과 자획이 비슷한 '유(庾)', '진(辰)'과 발음이 비슷한 '신(信)'을 써서 이름을 유신이라 짓게 되었다.<ref name="biography1">《삼국사기》권제41, 열전1 김유신 상(上)</ref><ref group="주해">중국 [[북주]]의 문장가이자 관인이었던 유신(庾信)과도 이름이 같다는 이유도 있었다.</ref>
 
== 생애 ==
=== 유년기 ===
그가 태어난 이래로 그가 15살이 되는 [[609년]]까지, 유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유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화랑]](花郞)이 된 것은 15살의 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다. 그는 용화향도를 이끌고 산천을 주유하며 심신을 수련했다. 18살에 화랑의 우두머리 국선(國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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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상 유신의 첫 전투로 알려진 낭비성에서의 싸움에 신라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인물 가운데는 [[파진찬]](波珍湌) [[김용춘]](金龍春)도 포함되어 있었다. 용춘의 아들로서 훗날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김춘추(金春秋)와는 훗날 정치적 동맹자로서 굳건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들 사이의 동맹에는 양자간에 중첩적인 혼인을 통한 혈연관계 형성이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때는 [[음력 1월 16일|정월 오기일]](烏忌日)]]<ref group="주해">해는 구체적으로 몇 년도인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문무왕이 태어난 [[626년]]에서 멀지 않은 이전 시점으로 여겨진다.</ref>, 뜰에서 춘추와 함께 축국을 하던 유신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터지게 하고서, 옷고름을 꿰맨다는 핑계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누이동생 문희에게 그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춘추는 자주 유신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마침내 문희가 임신하게 되자 유신은 "혼인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누이를 화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뒤, 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날에 맞춰서 집 뒤뜰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를 피워올렸다. 남산에서 이 연기를 목격한 왕이 좌우 신료들에게 묻자, 신료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왕에게 아뢰었고, 마침 왕의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춘추를 본 왕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임을 짐작하며 얼른 가서 구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혼인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인평]](仁平) 9년([[642년]]) 백제는 대야성(大耶城)을 비롯한 신라 서쪽 40여 성(城)을 쳐서 함락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춘추의 사위였던 대야성주 [[김품석]](金品釋) 부부가 죽자 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 파병을 요청하러 떠났다. 고구려로 떠나기 전날, 김춘추는 김유신을 찾아와 “지금 내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려 하는데, 60일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은 어찌하겠소?”하고 묻자, 김유신은 “그렇게 된다면 내가 탄 말의 말발굽이 반드시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 왕의 정원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맹세를 나누었다. 춘추가 떠난 뒤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주변)의 군주(軍主)로 옮겨간 그는 춘추가 억류되었다는 소식에 군사 1만(열전에는 3천)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왕에게 고구려로 보내줄 것을 요청해 출동 기일에 대한 칙허를 받아냈으며, 신라에 간첩으로 와있던 승려 덕창(德昌)의 보고를 접한 고구려 조정은 전쟁 방지를 위해 춘추를 석방해 무사히 풀려났다.
 
==== 백제와의 전쟁 ====
인평 11년([[644년]]) 진골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소판]](蘇判)으로 승진하였다. 가을 9월에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왕명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 성열성(省熱城) · 동화성(同火城) 등을 포함한 7성을 점령했다. 이듬해([[645년]]) 정월에 서라벌로 돌아와 개선 보고도 하기 전에 다시 백제의 장군인 [[계백]](階伯)이백제군이 매리포성에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여왕은 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막게 했다.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나가 [[계백]](階伯)이 이끄는출정해 백제군 2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고, 음력 3월에 다시 백제의 침공을 격퇴했다.
 
==== 비담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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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적 ==
*<small>※ 표시된 날짜는 서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음력이다음력입니다.</small>
*<small>※ 신라의 고유 연호를 쓰던 시기는 모두 연호로, 그렇지 않은 경우는 왕의 재위년도로 표기하였다표기하였습니다.</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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