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도서집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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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본 ==
판본으로써는 옹정 6년([[1728년]])판 동활자본(銅活字本) 원판본이 있고, 그 영인본이 상하이 동문서국(上海同文書局)에서 간행되었다. 원판본과 영인본 모두 유통된 판본은 적었다. 이밖에 상하이 도서집성국(上海図書集成局)이 광서(光緒) 10년([[1884년]])에 간행한 판본(활자본)이 있는데 이쪽은 축소 인쇄본도 있으며 타이완판(台湾版) 영인본도 나오는 등 널리 유통되었다.
 
또한 「고증」(考証) 24권 ・ 「목록」 40권 ・ 「분류목록」(分類目録, 문부성文部省편) 등의 참고도서류가 있어서 본서 이용에 활용되고 있다.
 
== 국외로의 전래 ==
[[파일:Geojunggi.png|200px|섬네일|오른쪽|[[화성성역의궤]]에 실려 있는 거중기의 그림. 정약용이 거중기를 고안할 때 참조한 기기도설은 고금도서집성을 통해 입수된 것이었다. ]]
[[1781년]]에 규장각에는[[규장각]]에는 총 3만 책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고금도서집성》 5천 책을 포함한 숫자였다. 이 책은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규장각 건물에 보관되어 규장각을이곳을 출입하는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조선]]의 [[조선 정조|정조]]는 즉위한 직후에 사절을 청에 보내면서 부사 [[서호수]](徐浩修, 1736~1799)에게 특별히 당시 청 왕조에서 편찬중이던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구입해 오라는 명을 내렸지만, 현지에 도착한 사절단은 당시 《사고전서》는 아직 인쇄가 완료되지 않았고 인쇄한 수량도 4건에 불과하여 구입하기가 어려움을 보고 방향을 바꾸어 《고금도서집성》을 당시 숙소를 출입하던 서반(序班)<ref>청나라 홍려시(鴻臚寺) 산하 사의(司儀) · 사빈서(司賓署) 소속 종9품 관리. 시반(侍班) · 제반 (齊班) · 규의(糾儀) · 전찬(傳贊)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연경에 온 조선의 연행사들은 청나라 관아의 역사에 종사하던 이들 서반을 통해서 연경의 사정을 전해듣거나 그들을 통해 서적, 서화 등속을 비싼 값에 수입하기도 하였다(이성혜 《한국 근대 서화의 생산과 유통》 해피북미디어, 2014년).</ref>들을 통해 구입했다. 그때 대금으로 은 2,150냥이라는 거금을 지불했다고 한다.<ref>홍한주(洪翰周)의 《지수염필》(智水拈筆)에는 조선에서 온 사신들이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할 당시, 연경의 서점가 사람들은 "이 책은 간행된 지 50년이 지났는데, 귀국은 문(文)을 숭상한다면서 이제야 사가는지요? 일본에서는 이미 나가사키에서 1부, 에도에서 2부 등 이미 3부를 구해 갔습니다"라며 비웃었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ref>
 
《고금도서집성》이 조선에 들어오자 정조는 우선 책을 조선식으로 다시 장정을 하고, 규장각 검서관이던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에게 책의 목차를 베끼게 했는데 이 네 사람이 목차를 쓰는 데만 40일이 걸렸다고 하며, 목차가 완성되자 정조는 당대의 명필이던 [[조윤형]](曺允亨)에게 책의 제명을, 사자관들에게는 부의 제목으로 쓸 글씨를 쓰게 했다.
 
서호수의 아버지로 규장각 설립을 주도했던 [[서명응]](徐命膺)은 세계지리서인 위사》(緯史)를 편찬하면서 이 책에 수록된 지리 정보를 인용했으며, [[정약용]](丁若鏞)은 [[1790년]] 무렵 화성을 건설하던 정조가 《고금도서집성》에 포함되어 있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주면서 건설비용을 절감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명했고 정약용은 《기기도설》에 나온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였다. [[이규경]](李圭景)은 서유구가 소장한 《기기도설》을 통해 이 책의 저자인 요한 테렌즈 슈렉이 기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면서 쓴 알파벳 부호를 보았고,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이 문자를 소개하고 그 발음을 한자로 기입해 "이것만 익히면 온갖 소리를 기록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ref>[http://www.edasan.org/sub03/board03_list.html?bid=b32&page=56&ptype=view&idx=2070 (다산연구소) 18세기 지식정보의 보고(寶庫), 『고금도서집성』]</ref>
 
일본에서는 조선보다 훨씬 일찍 《고금도서집성》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이 책이 완성 후 얼마 되지 않아 [[에도 막부]]의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해서 전해진 초판 인쇄본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 초판 인쇄본은 막부의 장서문고인 모미지야마 문고(紅葉山文庫)의 일부가 되었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신정부의 장서가 되었다가 [[메이지 천황]]에 의해 [[도쿄제국대학]]에 하사되었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으로 도서관이 불타면서 이 판본도 소실되고 말았다. 또한 일본측에서는 「고증」(考証) 24권 ・ 「목록」 40권 ・ 「분류목록」(分類目録, 일본 [[문부성]] 편) 등의 참고도서류가 있어서 본서 이용에 활용하고 있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