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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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ㅗㄹ ㅂ ㅏ
 
ㅁ ㅓ ㅂ ㅏ
== 정치 활동과 독립운동 ==
=== 초기 활동 ===
[[파일:1919년 임시의정원.jpg|섬네일|250px|왼쪽|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초기 임시 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국내의 비밀행정조직망)와 교통국(임시 정부 통신 기관)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신문 (대한민국 임시 정부)|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며,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애국공채 발행과 국민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1919년 7월 임시 정부는 [[국제연맹]] 등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을 편찬하기로 하고, 7월 7일 정부령으로 국무원 내에 '임시사료편찬회'를 설치하였다. 임시사료편찬회는 총재 [[안창호]], 주임 [[이광수]], 간사 [[김홍서]]와 위원 8명 및 조역 22명 등 총 3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9월 23일 4편 4책으로 된 사료집을 완성하여 출판하였다. 총 100질을 출판하였는데, 이 중 1질이 미국 콜롬비아대학 극동도서관에 완질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ref>한시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1914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년</ref>
 
초기 임시 정부 내부에는 이념적 갈등이 존재했다. 이승만과 안창호가 독립운동의 방략 상으로 대립하였으며, 이념적으로도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여 서로 충돌하였다. 임시 정부 내의 사회주의자들끼리도 서로 뭉치지 못하고, [[안병찬]],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이르쿠츠크파]]와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파]], 그리고 [[김준연]]을 중심으로 하는 [[엠엘파]](ML)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오자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의 독단적인 [[구미 위원부]] 설치 건과 국제연맹 위임 통치 건에 반대하였는데, 특히 [[소비에트|러시아]] [[연해주]] 거류 동포사회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가 임시 정부에 통합되며 그들의 대표로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는 미국교포의 독립자금을 축내며 외교운동으로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을 맡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며 국무총리 직을 사임하였다.
 
이동휘가 사임하고, 이승만에 반대하는 [[신채호]] 등이 이탈하자 임시 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안창호는 코민테른 자금을 임시 정부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만드는 데 이 자금을 사용하여 이승만을 견제하였다. 이승만은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불가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반임시 정부적인 [[군사통일 촉성회]]의 국민대표회의 개최 주장이 호응을 얻자 임시 정부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하여 안창호와 김규식이 내각에서 사퇴하였다.
 
=== 창조론, 개조론 논쟁 ===
{{참고|국제공산당 자금사건|국민대표회의}}
 
1921년 임시 정부는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혁명자금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는데, 그가 보내온 40만 루블과 20만 루블을 수령한뒤<ref>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 1994) 49쪽</ref><ref>김구, 《백범일지》(돌베개, 2003) 311쪽</ref>, 자금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동휘]]는 [[한형권]], [[김립 (1880년)|김립]]을 보내 60만루블을 수령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동휘]] 등은 임시 정부에 지원금을 납부하지 않았고, 이에 [[김구]]는 [[이동휘]] 일파를 추격하여 [[김립 (1880년)|김립]]을 암살하고 [[이동휘]], [[한형권]] 등을 비롯한 임시 정부 내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 정부의 해체와 재건을 주장하는 [[신채호]] 등의 창조파와 임시 정부의 개혁을 주장하는 [[안창호]] 등의 개조파로 분열되어 결국 아무런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였으며, 내무총장 김구는 유명무실해진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후 [[재중국청년동맹]], [[주중국청년동맹]] 두 공산계열 단체가 경쟁했으며, 좌우 통일을 위하여 안창호 등에 의해 [[유일독립당촉성회]]가 결성되었으나 사회주의 계열과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되는 등 양자의 분열을 거듭하였다.
 
=== 일본에 대한 정치공작 ===
임시 정부에서 심어둔 공작원들은 여러 번 [[일본 영사관]]이나 [[조선총독부]]의 문건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들 공작원들은 목숨을 걸고 적지에 침투하여 [[조선총독부]]의 자료들을 빼돌렸고, 총독부나 일본 영사관 내에 근무하는 친일파들을 설득, 포섭하여 문건을 빼돌렸다.
 
[[청산리 전투]] 직후 일본군의 문건 내용을 청취한 [[박은식]]은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남겼다. '우리 사령부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적군(일본군)의 사상자가 천6백여 명이었고, [[중국]] 관청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군의 사상자는 천 3백여 명이었다.{{출처|날짜=2013-04-03}} [[일본 영사관]] 비밀 보고서에 의하면 이도구 전투들에서 카노 연대장,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군병 사망자가 9백여 명이라고 하였다.{{출처|날짜=2013-04-03}}'라고 기록했다.
[[이범석 (1900년)|이범석]] 역시 일본군의 기밀을 훔쳐낸 사실을 자신의 회고록 [[우둥불]]에 기록하였다.
 
{{인용문2|도전이 말 등에 실고 있던 마대 속에 드른 쇠통 속에서 우리는 휘황찬란한 빛나는 금쪼각 같은 귀중한 물건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도전이가 쓴 지 얼마 안되는 보고서로 봉투에 부친 풀이 아직도 채 마르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것은 가납 연대장에게 보고하는 문건이었으나 도리혀 우리에게 적정을 알게 하는 좋은 보고가 되었다.<ref>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1 여름》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사, 2007) 401페이지</ref>}}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많은 임정 파견원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 집단지도체제와 위기 ===
[[1925년]]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을 통해 대통령 직에서 탄핵되고, 뒤이어 취임한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친 뒤 사임하였으며, 초대 국무령 [[이상룡 (1858년)|이상룡]]이 서간도에서 상하이로 왔지만 내각 조직에 실패하여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그 뒤, [[1925년]] 2월 [[양기탁]]을 국무령에 천거하였으나 사퇴하였고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여 의정원의장 [[이동녕]]이 국무령을 맡게 되었다. [[홍진]]이 제3대 국무령으로 뽑혀 [[전장 시|진강]]으로부터 상하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다.
 
[[1927년]] 12월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며, 김구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1928년]] 이동녕을 국무령으로 추대하고 김구는 내무부를 맡아 임시 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하였다.
 
1921년 이후 임시 정부는 상하이와 국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던 연통제, 교통국과 같은 국내 비밀행정 조직망이 파괴되고, 외교 선전활동의 무성과, 심각한 재정난 등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인원도 줄어들어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감소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밀정을 파견하여 임정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하였고, [[김희선 (1875년)|김희선]], [[이광수 (1892년)|이광수]], [[정인 (임시 정부)|정인]]과 같은 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하여 국내로 돌아가버렸다.
 
=== 한인애국단과 임정의 노력 ===
[[김구]]는 국내, 만주와 연락이 되지 않자 미주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시카고의 [[김경]]이 이끄는 [[공동회]], 하와이의 [[안창호]]를 비롯한 여럿,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국민회]]를 중심으로 [[김호]] 등, 멕시코의 [[김기창]]과 [[이종오]], 쿠바의 [[임천택]] 등, 동지회의 [[이승만]]을 비롯한 여럿이 모금에 참여해 주었다. 이러한 미주 동포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1931년 김구는 보다 직접적인 항일 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특무 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시켜 [[쇼와 천황|히로히토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암살에는 실패하였다. 또한 [[이덕주 (1908년)|이덕주]]와 [[유진식]]을 국내로 파견하여 조선총독 암살을 지시하였으며, [[유상근]]과 [[최흥식]]을 만주로 파견하여 [[관동군]] 사령관, 관동청 총재 등의 암살을 지시하였다. 이어 [[제1차 상하이 사변|상하이사변]]이 터지고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승전기념 및 천장절 행사가 열리자 [[윤봉길]]로 하여금 폭탄을 던지게 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한 일본군 고관들을 암살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상하이를 떠나서 숨어 지내야 했으나 남경으로 옮긴 [[중화민국]] 정부는 이를 계기로 김구와 임시 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피신한 김구는 [[1933년]] [[중화민국]]의 [[장제스]]를 만나 항일전선 협력에 합의한다.
 
이 무렵에 양기탁이 [[1933년]] 국무령에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직한다. [[1933년]] [[3월 6일]] 제25회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의 사표 제출 문제는 조소앙 (외무)·조완구(내무)·김철(재무) 3명의 경우 수리하고 이동녕(법무)·김구(군사)는 반려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따라서 집단지도체제에 따라 국무위원을 11명으로 증원하였다. 유임된 이동녕·김구 외에 이유필(면직) ·조성환(무임소)·이승만(무임소)·윤기섭(군사, 김구 후임)·김규식(외무, 신익희 후임 6. 21)·[[차이석]](내무)·최동오(법무)·신익희(외무)·송병조(주석) 9명이 국무위원으로 추가 보궐 선임되었다.<ref>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4페이지</ref>
 
1934년 1월 3일 국무위원 개선에 앞서 송병조 주석의 정무와 예산 관계의 정무 보고가 있었다. 여기서 신익희와 윤기섭의 사표가 수리되어 국무위원이 11명에서 9명으로 축소 결정되었다. 후보 12명을 선거한 결과 양기탁(주석)·송병조(재무)·조소앙(내무)·김규식(외무)·윤기섭(군무)·최동오(법무)·김철(무임소)·조성환(무임소)·성주식(무임소) 등 9명이 당선되었다.<ref>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5페이지</ref>
 
그러나 중일전쟁의 발발로 임시 정부는 항주와 진강, 장사, 광주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충칭에 자리잡은 임시 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연합군]]에 가담하여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ref>[[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지만, [[연합국 (제2차 세계대전)#대한민국 임시 정부|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에 승인받진 못하였다.</ref> [[일본]]에 선전포고하지만 한국 광복군이 미처 국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노력 ===
[[파일:Kim Gu (1947).jpg|섬네일|오른쪽|130px|김구]]
 
1935년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노선의 갈등으로 두 달 만에 분열되었다. 이후 임시 정부를 비롯하여 중국의 독립운동 진영은 둘로 나뉘게 되었는데, 하나는 [[김규식 (1881년)|김규식]]과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임시 정부의 [[김구]]와 [[조소앙]]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이었다. 임시 정부는 [[가흥]]의 [[남호]]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가져 민족혁명당의 통합운동으로 해체 위기까지 갔었던 임시 정부의 조직을 회복하는 것을 결의하였다.
 
1939년 8월 좌익 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민족전위동맹|조선청년전위동맹]]과 민족주의진영인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표들이 [[기강]]의 영산호텔에 모여 통일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통합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조선민족전위동맹|조선청년전위동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이탈하였고, 9월에 나머지 5 당 대회가 속개되었지만 의견을 일치를 보지 못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이 이탈하였다. 결국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비롯하여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요인들이 결집함으로써 [[한국독립당]]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 1940년 임시 정부는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개편한 뒤 한국독립당의 김구를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 정부에 합류하게 되면서 김규식이 부주석에, 김원봉이 군무부장 겸 한국 광복군 부사령에 선임되었다.
 
=== 국제사회를 향한 외교적 노력 ===
[[1919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이승만]]은 [[미국]]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김규식 (1881년)|김규식]]은 [[프랑스]] 파리에서 전승국의 추인하 독립을 추진하였다. 임시 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중국과 폴란드로부터 승인을 얻어내었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영국]]은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인정하였지만, 그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도 임시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2페이지</ref> 단, 미국 정부에서는 승인하지 않았지만 미국 의회에서는 임정을 승인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832765 43년 美의회에서 상해임정 승인결정]</ref> 한편 1944년 임정은 [[소련]]으로부터의 승인을 받았다.<ref>[http://folkency.nfm.go.kr/sesi/dic_index.jsp?P_MENU=04&DIC_ID=1034&ref=T2&S_idx=67&P_INDEX=2&cur_page=1 한국민속대백과사전,국립민속박물관]</ref> 다음 해
[[1945년]] [[4월]] 임시 정부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임시 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은 충칭 주재 프랑스 대사를 만나 임정을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사실상(De facto) 승인한다는 말을 전달받았다.<ref>같은 책, 93페이지</ref>
 
=== 한국광복군 창설 ===
[[파일:Korean Liberation Army.JPG|썸네일|400픽셀|왼쪽|한국광복군 대원들 (1939년 4월 4일)]]
[[파일:Korea Independence Army.jpg|섬네일|400픽셀|왼쪽|한국광복군]]
{{본문|한국 광복군}}
[[파일:Daihan Minguok Limshi Zhengfu.jpg|210px|오른쪽|섬네일|[[충칭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39년 1월 8일 창립된 임시 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고, 이후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준비, 계획하였다. 임시 정부는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여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1942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으며, 충칭에 조선의용대를 포함한 1지대를 두고 [[서안]]과 [[부양]]에 각각 2지대와 3지대를 설치하였다. 임시 정부와 한국독립당, 그리고 한국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부담하였으며,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이 이끄는 부녀위로총회에서 중국돈 10만원을 기부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 정부는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한국 광복군은 [[조선의용대]]와 마찬가지로 창설 이래 군 통수권이 한동안 [[중국 국민당]]이 집권한 [[중화민국]] 정부 아래에 있었으나, 김구의 노력으로 1945년 회복할 수 있었다. 1943년 한국 광복군의 일부 대원이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버마 전선에서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임시 정부는 미국 OSS(미국 전략 사무국)의 도노반 소장과 교섭하여 한국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비밀리에 국내에 침투하여 미군과 함께 공동 작전을 수행하는 '독수리 작전'으로 알려진 [[서울 진공 작전 (1945년)|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작전에 따라 사전트 소령이 이범석과 함께 서안 2지대에서 광복군에게 비밀 특수훈련을 실시하였으며, 윔쓰 중위는 [[김학규 (1900년)|김학규]]와 함께 부양 3지대에서 훈련을 실시하였다. 훈련은 3개월 동안 실시되었으며, 1945년 8월 마침내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편성된 국내정진군의 선발대가 국내의 요소 파괴 및 일본군 교란의 공작 임무를 받아 서해안으로 침투할 준비를 마쳤으나 안타깝게도 침투 직전 일본이 항복하면서 시행되기도 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 해방 정국의 임정 ==